세상에는 “열등감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무려 95%가 넘는 사람이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말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자기 능력의 30%밖에 발휘하지 못하지만, 긍정적 평가로 자신감을 주면, 자기 능력의 500%까지도 발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Pandemic을 통과하며, 자신감보다 열등감이 더 커져서, 모든 것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잘 할 수 있고, 더 힘있게 살아갈 수 있지만, 우리 입술에 ‘죽겠다! 힘들다!’ 부정적 말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자신감 상실은 마침내 영적 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영적 위축감은 하나님 주신 은혜와 구원까지 의심하게 하고, 종국에는 우리 삶의 곳곳에 엄청난 악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감 상실과 영적 위축을 하나님과 악한 마귀 중 누가 더 좋아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목회 서신!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는 바울이 인생 말기에 썼기에, 그 신학과 목회적 완숙함이 참으로” 깊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석방된 후, 디도와 함께 크레테 섬에서” 동역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타지로 떠나며, 크레테 교회에 장로를 세우고, 정통신학을 가르치고, 성도를 바르게 교훈하기 위해 디도를 남겼던 것”입니다. 마침내 “복음의 황무지인 크레테 지역이 하나님 은혜, 그리고 바울과 디도의 헌신으로 크게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디도서 서론인데, 처음부터 바울의 어투와 사용한 용어에서 깊은 연륜과 자신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자신감은 허세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 주시는 자신감은 영적 담대함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영적 자신감은 세상 풍파와 고난에 주눅 들지 않고, 다시 힘을 내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2021년 “연초에 디도서 묵상을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과 “디도가 앞이 보이지 않는 크레테 섬에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갔던 자신감이 우리 한 소망 교회와 모든 성도님에게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전히 “고난과 어려움을 겪는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교훈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어렵고 힘든 지금! 우리가 영적 자신감을 회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영적 자신감을 회복하려면 ‘내가 누구의 종인가?’ 바로 알아야 한다.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종, 둘로스는 노예와 하인, 또는 일꾼, 신하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비록 세상이 잘 몰라도, 나는 하나님께 속한 주의 종이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일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당당하게” 선언했습니다. 당시 “바울은 비록 늙고 초라했지만, 세상의 평가와 선입견에 약해지지 않았고, 하나님께 속한 종으로서 항상 영적 자신감이” 컸습니다.

바울은 “누가 뭐래도! 자신이 하나님 종이요,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똑똑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하며, 항상 내 열등감을 극대화” 시킵니다. 매번 “할 수 있다는 긍정보다 할 수 없다는 부정으로, 포용보다 배척하게” 합니다. 마귀는 “내가 누구에게 속해야 하고, 누구를 섬겨야 하는지! 극심한 혼동을” 줍니다. 물론 “우리는 죄인이고 자주 넘어지지만, 그래도 나는 너무도 존귀한 하나님 자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 43:1절은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합니다. 또한 “사 43:4절은,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심은 우리가 범죄 하고도 뻔뻔하여지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누구의 종인지, 누구에게 속했는지, 바로 알라는 도전”입니다. 사사 “기드온은 300명으로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미디안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자를 만났을 때! 기드온은 불평과 원망이 커서, 삿 6:15절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 집은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큰 열등감에 빠진 기드온에게, 삿 6: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에 “기드온 자신은 연약했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함께하시는 큰 용사임을 깨닫고 영적 자신감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깊은 열등감에서 자신감을 되찾은 이유는 자신이 누구의 종이고, 누가 함께하는지! 똑바로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내가 나를 보면 많이 부족해서 실망하지만, 하나님 관점으로 다시 나를 보면,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귀는 “계속 열등감으로 나를 보게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영적 자신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 자녀! 하나님의 종이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부족해도 “내가 하나님의 종임을 인정하고 살아가려면, 항상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힘들지만 “내가 하나님 종이고, 하나님이 내 주인임을 확신한다면,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종이 되어, 세상 것을 주인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내가 하나님보다 앞서고, 하나님을 내 실수와 귀찮은 일을 뒷수습하는 분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참담하게도! “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하나님을 이용하며” 살아갑니다. 실례로 “어떤 성도는 하나님을 Spare tire처럼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두고,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아갑니다. 다만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 나고, 사고가 있을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성도는 “하나님을 보조석에 앉게 하여, 하나님과 나름대로 가까이하며, 때로 하나님 원하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종 결정권, 운전 방향은 모두 자기 뜻대로” 합니다.

어떤 “성도는 하나님을 운전석에 정중히 모시고” 살아갑니다. 이들은 “삶의 최종 결정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서 하나님께 속한 삶, 하나님 종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여전히 하늘의 평안과 은혜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세요?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누구에게 속해서 살아가는지, 누구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지, 자문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비상시기,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돕기 위한 비서로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2021년 새해를 선물로 받았기에, 누구나 2020년보다 더 낫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더 나아지려면, 반드시 내가 하나님 종임을 기억하고, 앞으로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주인 삼고 살아가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이번 한주도 하나님만 주인 삼아 영적 자신감을 회복하여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영적 자신감을 회복하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바울은 “본문 3절에서,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 종과 사도 되게 하신 이유를 전도 때문이다!” 말합니다. 전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에게 하나님과 복음을 알려주고 전하는 모든 헌신을” 뜻합니다. 전도를 통해 “본문 1~2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들이 택하심을 받고, 믿음과 경건함, 진리와 지식에 속하고, 영생과 소망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고귀한 사역을 맡겨주심에 감사했고, 이로 인해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헌신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인생은 할 일이 없는 삶이 아니라, 할 일이 있지만 이를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아직 “내가 살아있음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인데, 많은 사람이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특히 “2020년부터 지금까지 버겁고 힘든 터널을 통과하며, 외출은 물론 교류까지 끊어져서, 더더욱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막막함만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자신감을 가지고 남은 삶을 살아가려면, 가만히 있지 말고, 내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우선 “내가 만나는 모든 관계에서, 특히 가족은 물론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서, 내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내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행전 11:26절은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말씀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예루살렘이 아닌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쓰였다!” 증언합니다. 그 기초는 “바울이 10여 년 고향에서 칩거를 마치고, 해야 할 일, 맡은 일에 충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바울이 다소에서 10여 년 칩거하며, 얼마나 불안하고” 막막했을까요?

그런데 “바나바, 아니!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안디옥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을 찾았을 때, 바울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헌신했을까요? 이처럼 “맡아서 해야 할 일을 찾은 바울은 영적 자신감을 회복했고,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실례로 “우리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을 찾을 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에 먼저 헌신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하나님 기뻐하는 일이라면, 거부하거나 빼지 말고 맡아서 충성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는 일을 하면, 자신감을 잃고 죄의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죄인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하면, 자신감이 충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책임지심, 앞서가심과 길을 여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18세기 “영국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는, 당시 영국 경제의 1/3을 차지하는 노예무역을 폐지하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노예제도 없이는 나라 경제가 어려워진다. 엄청난 항의와 박해, 위협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윌버포스의 영적 소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영국을 사랑하기에 노예제도를 반대한다. 노예제도가 영국 경제에 엄청난 이익을 주지만, 노예제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이 아니다. 영국이 더 나아지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윌버포스는 “무려 50년간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끊임없이” 헌신했습니다.

그렇게 “윌버포스의 노력 끝에,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노예제도 폐지를 법제화”했습니다. 그 후 “영국은 더 발전했고,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영적 “자신감을 회복하려면, 성령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부터 먼저 멈추어야!” 합니다. 틀렸는데 “고집부리며 시간 끌고, 하나님과 역행하는 삶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인생이 “짧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기에, 더욱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찾아 헌신해야!” 합니다. 어렵지만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하면, 내 능력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더 많은 생명을 살리며, 하나님께 더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2021년! “우리 삶이 다사다난하겠지만, 그래도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먼저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열등감이 가득한 세상에서, 항상 자신감 충만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