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길을 걷는 중, 남루한 차림으로 구걸하는 걸인을 만나자,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톨스토이는 걸인에게 너무도 미안해하며” 말했습니다. “형제여! 정말 미안합니다. 돈이 있었으면 기꺼이 주었을 텐데,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자 “걸인이 오히려 더 감사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바로 지금 제가 구한 것 이상을 주셨어요! 저를 형제로 불러주셨잖아요!”

톨스토이는 “이 일을 계기로, 그 삶이 변화되면서, 훗날 불후의 명작인 부활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어렵고 힘들어도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이유는, 사람을 살리고 세워야 나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살릴 기회가 있고, 살릴 수 있지만, 다양한 변명과 핑계로 이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기독교인이 살리고 세워야 할 사명이 있음은, 우리 주님께서 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변을 보면, 살겠다는 사람보다 죽겠다는 사람, 실족하여 넘어져 가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나부터 나는 물론 타인을 살리는지, 반대로 살아가는지! 확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너희 믿는 자들, 복음으로 살아난 자들’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힘들었지만 “바울의 헌신으로, 영적으로 너무 척박했던 데살로니가가 죽음에서 살아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살리고 세우는 과정은 절대로 쉽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살리려고 때로 유순한 유모처럼 부드럽게 다가갔고,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헌신했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자비량으로 수고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데살로니가 지역이 살아났고,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요한은 “요1서 4:9절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말합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주신 이유는, 죄인인 나를 살리고 세우시기 위함에 있다.”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이 악한 세상을 살아도 항상 주변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삶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주변 사람을 어떻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살리며 살아갈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살리는 삶을 살려면, 권리보다 의무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7절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하였다!” 말씀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살리면서 그 고생이 컸기에, 충분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유모가 되어 자녀를 기르듯 사역했다!” 고백합니다. 유모는 “아이를 돌보며, 아이에게 어떤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아이는 “유모가 자기를 먹이고 입히며 온갖 의무를 다해도 이를 잘” 모릅니다. 그렇게 “바울이 권리보다 의무를 이행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최근 “세상의 갈등과 대립은 저마다 의무 이행보다 자기 권리 주장이 더 많아지기에” 발생합니다. 수고와 “헌신보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나를 알아 달라!’ 권리 주장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게 “의무 이행보다 권리 주장이 더 많기에, 우리의 삶과 공동체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무 이행보다,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이래서 틀리고 저래서 맞는 거야!’ 지적하고 불평하며 권리만 주장하는 영혼이 있다면 힘겨워!” 합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성도가 권리 주장보다 의무 이행이 더 많지만, 반면에 약해져 가는 교회는 성도가 의무 이행보다 권리 주장이 더욱”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권리 주장과 의무 이행 중 무엇이 더” 많습니까? 1967년 “유명한 6일 전쟁이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발발”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아카바만의 선박 통제를 선언하여 이스라엘을 자극했고, 요르단 이란 등과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6월 5일, 기습 공습 3시간 만에 아랍 전투기 400대를 궤멸”시켰습니다. 전쟁 “초기에 아랍 국가들에 훨씬 유리해 보였지만, 이스라엘은 불과 6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지나 수에즈 운하까지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전쟁 후 “학자들은 전쟁의 승패 원인을 전쟁에서 발생한 전사자에게서” 찾았습니다.

당시 “아랍 국가의 전사자 대부분이 사병이었지만, 이스라엘 전사자의 대부분은 장교”였습니다. 이는 “누가 전쟁에서 솔선수범했는지 보여” 줍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장교의 의무 이행은 자국에 승리를 선사했지만, 이집트와 아랍은” 달랐습니다. 물론 “우리가 권리 주장보다 의무를 이행하면 손해 보고 힘들거나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주변 사람이 ‘저 사람은 원래 저래! 시키면 또 할 거야! 괜찮아!’ 생각하여, 바보처럼 취급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나부터 권리 주장보다 의무 이행을 실천한다면, 내가 영적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부족해도 “계속 이어지는 나의 의무 이행으로 가정과 교회, 주변 공동체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권리 주장보다 의무 이행하는 사람을 주목하시고, 하늘의 풍성한 은혜와 복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실례로 “권리만 주장하면 주변 사람이 나를 떠나지만, 의무를 이행하며 살아가면, 주변 사람들이 내게 사랑과 동역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은 “마 26:53절에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말씀합니다. 당시 “로마의 군단은 보병 6,000명과 기병 1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말씀하신 12군단은 72,000명의 보병, 1,440명의 기병을” 뜻합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에 주둔 중인 로마 군대를 넉넉히 격파할 수 있는 군사력”이었습니다. 당시 “주님은 12군단을 부를 수 있는 권리와 힘이 있었지만, 오히려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았고, 죽어야 할 영혼이 영생을 얻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힘은 권리 주장하는 영혼보다, 의무 이행자가 많아야 하고, 그래야 사람을 살리고 세워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부터 권리 주장보다 의무 이행으로 사람을 살리고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람을 살리고 세워갈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 때, 사람을 붙이실 것”입니다. 삶에 “부족함이 없도록 넉넉하고 풍성한 은혜를 채우실 것”입니다. 그렇게 “나부터 권리 주장보다 의무 이행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려가기를” 원합니다.

2. 살리는 삶을 살아가려면,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쁘게 줄 수 있다.”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9절은,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말씀합니다. 당시 “바울은 자신의 헌신에 맞는 보상보다,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회에 끼치는 폐를 먼저 생각하여, 힘들어도, 장막 짜는 일을 하며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두 배로 힘들게 사역해서라도 하나님의 교회가 살기 원했고, 그렇게 자신보다 항상 데살로니가 교회가 먼저”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팔이 안으로 굽듯,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각자가 이처럼 자기중심적이기에, 서로 살리며 살아가기보다, 오히려 서로를 아프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머리로는 “이타적이어야 함을 알지만, 현실은 항상 내가 먼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천국과 “지옥의 공통점은 식사 때 사용하는 수저와 젓가락이 똑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서로 먹겠다고 큰 수저와 젓가락을 사용해서 전혀 못 먹지만, 천국은 큰 수저와 젓가락으로 서로 먹여주기에 항상 잔칫집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소망 교회 안에 묶어주셨는데, 지금 우리 모습은” 어떠할까요?

오늘 “우리는 내가 자기중심적일지 이타적일지, 바르게 선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아가서 “여러분은 자기중심적 사람과 이타적 사람 중 누구와 동역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안다면, 나부터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요셉은 “17세에 형들에게, 말하는 짐승인 노예로 애굽에” 팔렸습니다. 비록 “30세에 애굽 총리가 되었지만, 13여 년 시간은 정말 힘들어서 죽고 싶은 시간, 외로움에 치를 떤 시간이지” 않았겠어요?

심지어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갔을 때, 그 억울함이 얼마나 크고” 깊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훗날 총리로서 자신을 판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죽이지 않고 모두를” 살려줍니다. 만일 “요셉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다면, 당연히 자기 권력으로 형들을 죽이고 심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타적인 마음으로, 형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형들과 그 가족을 살렸기에, 입 애굽의 역사가 가능했고, 선민 공동체 형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면 어리석어 보이고, 내가 망하고 손해 볼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면, 나와 타인, 주변 모두가 살아날 수 있고, 하나님께도 큰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 자세는 세상보다 하나님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모르는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은혜를 가진 하나님 공동체가 먼저 바뀌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교회가 이타적이지 않다면, 교회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인권 변호사로 유명한 전종준 씨가 ‘U Thinking’이란 책을” 썼습니다. 여기서 “U Thinking은 ‘타자 중심적 생각으로, 세상이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타자를 우선에 두는 사고로 전환될 때,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사고 혁명”입니다. 특히 “전종준 씨는 U Thinking 사고 혁명을 하나님 말씀에서 그 기원을” 찾습니다.

실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주신 U Thinking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주님도 U Thinking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특히 “U Thinking의 반대로 I Thinking을 언급하면서, 이는 ‘나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기중심적 사고는 성공과 발전에도 한계가 있다!'” 지적합니다. 이유는 “자기를 긍정하는 자기중심적 사고는 성공의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인간의 목표와 목적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전종준 씨는 남을 위한 긍정, 남이 행복해져야 나도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도전합니다. U Thinking! “이 책이 독특한 이유는, 기존 자기계발서는 성공을 위해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 나는 고귀하다.’를 강조하는데, 오히려 U Thinking,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삶과 우리 한 소망 교회는 I Thinking & U Thinking, 이 둘 중 어디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하세요?

나아가서 “우리 각자와 한 소망 교회가 두 사고 중 무엇을 더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과연 “우리가 I Thinking과 U Thinking 둘 중, 어떤 사고를 선택하고 살아가야, 나와 우리 가정, 우리 자녀와 교회가 복되고 사람을 살리며 헌신해 갈 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가 I Thinking에서 U Thinking으로 변하여, 더 깊은 영적 체험을 하며 살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와 교회가 타인을 먼저 생각하여 살리고 세우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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