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를 보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노인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 노인이 어렵게 거대한 물고기를 잡았고, 이를 배에 매달고, 큰 기쁨으로 항구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항구에 도착하고 보니, 거대한 물고기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유는 “항구로 오는 도중, 상어 떼가 나타나서 물고기를 다 뜯어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노인은 깊은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노인과 바다는 “어쩌면 우리 인생이 평생을 열심히 살았지만, 이처럼 헛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세상 “누구도 이처럼 헛된 삶을 원하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수많은 사람이 헛된 것을 추구하며 이 땅을” 살아갑니다. 문제는 “몰라서 헛된 일을 추종하는 것도 억울한데, 만일 잘 알면서도 헛된 것을 추구한다면, 그 삶이 얼마나” 척박하겠어요? 우리가 “한 번뿐인 인생에서 헛되지 않으려면, 그 비결과 방법을 하나님과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박해와 핍박이 극심해서, 삼 주밖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한 것이 절대로 헛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헛되다. 케네 게고덴은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하는, 빈손의, 열매 없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사랑의 수고,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서, 곳곳에 좋은 소문이 났고, 여러 이방 교회에 아름답고 선한 본을” 보였습니다.
당시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역이 심히 힘들었지만, 그 결과가 헛되지 않음에 크게 감격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 1:2절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풍성과 부유함의 상징, 가장 화려하게 이 땅의 삶을 살았지만, 그 삶이 헛되다!” 말했습니다. 여기서 “솔로몬이 말한 헛됨은 죄인인 인간의 악함과 어리석음,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음을 깊이 한탄하여 고백한 것”입니다.
특히 “세상은 헛됨에 빠져도 주의 백성은 절대로 헛되게 살지 말아야 함을” 도전합니다.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친 후, 우리 삶이 헛되고 열매가 없다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내 삶이 “나와 주변 사람, 하나님마저 헛되다 하면 얼마나” 절망적일까요? 우리가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하면 헛된 삶을 이겨 낼지!” 살펴봅시다.
1. 헛된 삶을 살지 않으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2절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말씀합니다. 행전 16장은 “바울이 빌립보에서 당한 고난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당시 “바울은 실라와 함께 강제로 옷이 벗겨졌고, 매도 수없이 맞았고, 발에 차꼬가” 채워졌습니다. 성경은 “침묵하지만, 당시 말로 인한 폭력들, 비방과 조롱이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요?
바울은 “이런 고난과 아픔을 많은 싸움으로 표현했는데, 여기서 싸움은 정신적 영적 육체적 고난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에서도 영적 전쟁이 치열했지만, 이에 패하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당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된 것은, 사도 바울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 수많은 전쟁이 있는데, 이겨야 할 전쟁도 있고 져도 되는 전쟁도” 있습니다.
실제로 “육체적 전쟁은 병가의 상사처럼 이겨도 되고, 져도 큰 문제” 없습니다. 반면에 “영적 전쟁에서 패하면, 이어지는 영적 전쟁에서 계속 패할 수밖에 없고, 마침내 영생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영적 전쟁에서 패함은 일부가 아닌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영혼은 헛되고 무의미한 전쟁에 노력과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놀이터가 아니라 치열한 전쟁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수의 기독교인이 마귀에게 속아서, 두 가지 큰 착각에 빠져서,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패합니다. 먼저 “영적 전쟁이 끝났다고, 지금은 영적 전쟁이 휴전 중으로 착각”합니다. 또한, “영적 전쟁에 출정해야 할 기독교인이 자신의 영적 신분을 전쟁에 나가야 할 병사가 아니라, 그저 민간인 정도로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 심지어 가정과 내 삶에서 치열한 영적 전쟁이 진행 중인데, 적과 싸울 생각보다 방공호에 피할 생각부터”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알건 모르건,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치열한 영적 전쟁에 참전해야 하고, 참전했다면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복음을 항상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능력의 근원을 본문 3~4절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능력은 간사함과 부정, 속임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복음에 있다!” 바울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에서 세속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똑같은 세속적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복음으로 영적 전쟁에” 임했습니다. 그렇게 “말씀 붙잡고 승리했기에, 그 삶이 헛되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힘과 지혜로 마귀를 결코 이길 수 없지만, 말씀을 붙잡은 기독교인은 영적 전쟁에서 절대로 패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마귀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보다 내가 말씀을 얼마나 굳게 붙잡고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삶은, 하나님 말씀이 항상 나의 선택의 기준이 되고, 악한 세상에서 내 삶을 이끌어가는 힘과 능력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고, 말씀이 멈추라 하면 멈추는 삶이 말씀 붙잡고 사는 삶”입니다. 그렇게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말씀 붙잡고 매번 승리하며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 삶이 헛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주님께서 공생애 시작 전, 반복되는 마귀의 시험 모두를, 하나님 말씀으로 이겼다!”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공회원과 이방인의 공격에, 말씀을 붙잡고 대적하여 승리하였다!” 증언합니다. 바울도 “가는 곳마다 십자가 복음, 부활의 복음을 붙잡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한결같이 하나님 말씀 붙잡고 승리했다면,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비결은 말씀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영적 전쟁은 살아있는 동안에 계속 이어지기에,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에 “붙잡았고 은혜받았던 말씀도 소중하지만, 바로 지금, 바로 내가 하나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척박한 이민 생활에서, 지금 무엇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세요?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더 굳게 붙잡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며, 우리 삶이 헛되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어가기” 원합니다.
2. 헛된 삶을 살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4절은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 목적과 방향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에 집중되어 있다! 자신 있게”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기쁘게 하다. 아레스콘테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봉사를 의미”합니다. 당시 “공공의 유익을 위하여 살았던 인물의 묘비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아레스콘테스”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모든 사역 목적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게 했기에, 바울은 영적으로 승리하였고, 헛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항상 내 위주, 나를 유익하게 하는 일만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애, 자기 존중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기를 기쁘게 하다 보면, 마침내 하나님을 아프게 할 때가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 1항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묻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답변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경외하고 살아감은 정해진 시간만이 아니라, 영원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헛되게 살지 않으려면, 한결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드온이 “오브라에 에봇을 만들어서 본인과 선민 모두에게 큰 올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기드온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여 미디안 전쟁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용기를 내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던 신앙을 지키지 못해서, 모두를 올무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많은 기독교인 중, 혹자는 하나님을 잠깐 기쁘게 할 수도 있지만, 혹자는 계속 끝까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심히 많지만, 무엇보다 우리 말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본문 5절은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당시 “많은 사역자가 사람에게 아첨하는 말, 탐심의 탈을 쓰며 말할 때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말로, 데살로니가와 주변 소아시아 지역을 복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비록 “우리 말이 작고 사소해 보여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쓰이는가에 따라서 그 인생이 헛될 수도 있고, 많은 열매를 맺어갈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크고 심각한 폭력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폭력, 말로 주는 폭력일 것”입니다. 언어폭력의 “특징은, 가해자는 금방 잊을 수 있지만, 피해자의 상처와 아픔은 쉽게 잘 지워지지도 않고 오래 기억되어서, 어쩌면 평생을 힘들게 하는 트라우마가 될 수” 있습니다.
마 7:12절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씀합니다. 내가 “격려와 은혜 되는 말을 듣고 싶다면, 내가 먼저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은혜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한 번 뱉은 말이 쉽게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금방 잊는다고 착각하여, 함부로 말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나는 쉽게 아픈 말을 하면서, 타인의 작은 비판조차도 힘들어” 합니다.
어떤 “시내 버스에서 빈자리가 나자, 어떤 아주머니가 빈자리 앞에 있던 여학생을 밀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여학생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보자,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가 어디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그러자 “아이가, 그럼! 아주머니는 눈을 네모로 뜨실 수 있으세요?” 답했습니다.
내가 “듣기 싫은 말은 남도 듣기 싫어하기에, 기쁘게 말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침묵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교회의 “부흥, 영적인 승리,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선하고 복된 말에서” 시작됩니다. 특히 “기쁘게 하는 말은 모르는 사람, 멀리 있는 사람보다, 오히려 내게 가까운 사람, 친한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이유는 “내 말은 멀리 있고 모르는 사람보다, 가깝고 친한 사람에게 더 먼저 전달되고, 더 영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같은 말이라도 부드럽게, 상처 되지 않게, 배려하며 서로 대화하면” 좋겠습니다. 때로 “언어폭력은 원인도 모르고, 상대방과 관계가 깨지도록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때, 그냥 내뱉지 말고, 생각하고 말하는 거룩한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함부로 상처 주는 무례한 말을 버리고, 선하고 복된 말, 세우고 살리는 말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며, 헛되게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