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천국 백성으로 초청하셨지만, 마 22:24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혼인 “잔치의 주인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잘 준비했지만, 초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냉담”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업 때문에, 산 소를 시험해야 한다고, 다양한 핑계와 변명으로 자신들을 부르러 온 종들을 외면하며,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분노했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을 모두 데리고 오라!” 명령합니다. 그러나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실제로 주인의 마음에 합해서 혼인 잔치에 들어가도록 택함을 받은 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혼인 잔치 비유는 “과거 주님의 시대는 물론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부름과 청함을 받고 교회에 오는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받아 영생 얻는 영혼은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은 청함이 아닌 택함을 받고 영생을 얻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 청함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 중 어떤 부류가 더” 많을까요?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바울이 2차 선교사역 중, 빌립보 교회를 세운 후” 방문했습니다. 극심한 “유대인의 박해가 있어서 불과 안식일을 세 번밖에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중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의 13개 서신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그래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영적으로 자라가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본문 4절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말씀합니다. 택함의 “시작은 하나님께 있지만, 택함의 능력은 복음을 내 것으로 영접하면서” 시작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각 교회와 우리 각자를 택하셨지만, 문제는 택함을 받은 은혜를 얼마나 잘 지키며, 얼마나 신실하게 택함을 유지할지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께 받은 택함의 은혜를 잘”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성경의 인물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택함에 능력이 있지만, 우리가 이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택하셨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에, 움직이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계속 중보기도 하는 이유를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믿음 사랑 소망이 있다고 크게” 칭찬합니다. 특히 “믿음의 역사에서, 역사(에르구)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생각과 의지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사랑의 수고, 수고(코프스)는 피곤할 정도의 노동, 녹초가 될 정도로 고된 일을” 뜻합니다. 또한 “소망의 인내, 인내(휘포모네스)는 힘들지만, 맡겨진 일을 감당하며 머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역사 수고 인내는 모두 정적인 모습보다 동적인 모습을” 강조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서, 피상적으로 신앙생활 하지 않고, 말과 행동으로, 피곤할 정도로 헌신하며, 맡겨주신 일을 신실하게 감당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짧은 구절이지만, 택함을 받은 기독교인의 영적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신앙생활이 지극히 정적이고 주관적이고, 피상적이어서, 점점 무기력화되어 감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일을 할 때, 골치 아프고 복잡하면, 번거롭고 힘들면, 감당해야 함을 알면서도 이를” 거부합니다. 이유는 “택함을 받은 은혜를 모르기에,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신 은혜와 능력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택함을 받은 능력과 삶을 잃어가면서, 마침내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맙니다. 과거 “시카고에서 세계 각 교파, 교회 리더가 모여서 ‘성경에 오류가 없음을 어떻게 변증할 수 있을까?’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에서 3명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회의 기간 내내 조용히 침묵만” 지켰습니다.
마지막 날, “포럼에 참석한 타 교단 리더들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참석한 3인에게, 포럼이 어땠고 소감이 어떤지 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러시아 정교회 리더 중 한 명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흘 동안 이 회의를 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살다 보면 오류가 없다는 것을 저절로 알 텐데 그런 주제로 왜 회의를 해야 합니까?” 당시 “이 말을 들은 타 교단 리더들 모두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택함 박음을 망각하는 이유는, 내가 정적인 신앙이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받고 “행동하고 수고하기보다, 나 편한 대로 살아가려 하기에, 택함을 받은 은혜가 점점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영혼은 절대로 하나님 일에 정적일 수 없고, 오히려 마음과 뜻, 힘과 정성을 다해 동적으로 헌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18세기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던 조지 휫필드는, 평생을 사역한 후, 귀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나는 내 인생이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신앙은 동적인가? 아니면 정적인가? 자문해 보기” 원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눈에 보이면, 나부터 이를 감당하려는 마음 생긴다면, 나는 지금 동적인 신앙생활, 잘 믿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고, 심지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한심하게 보인다면, 지금 내 신앙은 정적인 신앙이고, 이는 하나님께 받은 택함을 서서히 잃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먹을 시간, 쉴 시간도 없이 새벽부터 기도로 공생애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심지어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풍랑이 이는 중에도 뱃고물을 베고 깊이 잠이” 드셨겠어요? 바울도 “시간 나는 대로 일하고, 복음을 전하고, 서신서를 쓰며 열심히” 헌신하였습니다.
심지어 “박해와 공격이 극심해도, 땅끝에 이르기까지, 순교하기까지 동적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바울이 동적 신앙으로 헌신하셨다면, 우리는 더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 번뿐인 “인생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실제로 우리 인생이 그렇게 장구하지!” 않습니다. 심중에 “‘나중에, 내일부터, 여건이 좋아지면, 자녀가 크면’ 정적인 사고가 있다면, 이를 극복해야 택함을 받은 내 신앙을 굳건히 지켜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훗날, 내가 정말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동적으로 헌신하고 수고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할 수 없을 때가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우리 삶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살아가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비록 “이민자의 삶이 버겁고 힘들지만, 그렇게 동적인 신앙을 가지고 헌신함으로, 택함을 받은 은혜가 더 굳건해지기” 원합니다.
2.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에, 우리는 영적으로 깊은 소통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5절은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말씀합니다. 행전 17:1~9절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불과 안식일 세 번만 거하며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이 전한 말씀이 사라지지 않고, 능력과 성령의 확신으로 바뀌어서 소아시아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전한 말씀이 어떻게 능력과 성령의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는가!’ 그 이유에 관해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가 서로 깊은 영적 소통이 없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소통이 깊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은혜받았고, 변했고, 점점 자라갔던 것”입니다.
깊은 “영적 소통이 바울을 더 힘있게 일하게 자극했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방에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본이 되는 교회가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첨단 과학이 발전하고, 다양한 SNS를 통해 많은 사람과 연결할 수 있지만, 현대인 대다수가 외롭다고, 군중 속의 고독을 호소하며” 살아갑니다. 세계적인 “축구선수 호날두는 SNS 팔로워가 무려 1,400만이라고 하는데, 과연 이들 중 몇 명과 깊은 소통을” 할까요?
많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믿는다, 예배드린다. 기도한다고 하지만, 영적 목마름에 더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은혜가 있고, 동역자가 있지만, 내 안에 영적 소통이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같은 장소에 있지만, 소통보다 서로 평행선을 긋는 동상이몽이 더욱” 많습니다. 금혼식을 “마친 부부가 잔치 후, 녹초가 되어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온종일 수고 많았어요. 당신이 참 자랑스럽고 고마워요!” 말했습니다.
이에 “아내가, 뭐라고요? 나는 지금 보청기를 빼서 잘 안 들려요!” 말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큰 소리로, 당신에게 항상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답했습니다. 이에 “소리가 잘 안 들린 아내가, 알았어요! 나도 당신한테 이제 신물이 나요!” 말했습니다. 어쩌면 “이는 바로 저와 우리의 이야기, 우리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실제로 “나는 누군가에게 호감을 표시했지만, 영적인 소통의 부재로, 이를 오해해서 시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소통되지 “않기에, 진심이 전달되지 않고, 오해가 쌓이며 동역자가 서로를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통 부재가 깊어지면,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마침내 택함을 받은 은혜마저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택함을 받은 은혜를 지키며 영적인 소통이 깊어지려면, 나부터 영적으로 깊어져서, 내가 먼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영적으로 깊어졌기에, 바울은 물론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며 성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내가 영적으로 얕기에,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체험한 후, 영적으로 깊어졌기에, 이방인에게까지 먼저 찾아갔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면서 영적으로 더 든든해서,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의사 “누가가 영적으로 깊어졌기에, 사도 바울에게 다가갔고, 하나님께 다가가며 택함 받음을” 지켰습니다. 마가 요한이 “영적으로 깊어졌기에, 과거 선교사역 중 중도 포기한 아픔을 이겨냈고, 주변 동역자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오늘도 부족한 내게 먼저 찾아오셔서, 말씀을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고, 예배드리게 하심은 우리와 영적으로 더 깊이 소통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전보다 더욱 말씀과 예배를 사모해야 하고, 이전보다 영적으로 더 성장해가야!” 합니다. 그렇게 “내 영혼이 수직적 수평적 소통이 풍성해지면, 우리 삶은 당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주변 사람과 하나님과도 풍성한 소통이 점점 막혀 가고” 있습니다.
탈현대주의 도전, “‘나는 혼자 다 할 수 있어! 내가 가진 기준이 최고야!’ 소통할 필요 없다고 속삭이는 것에 속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악한 마귀, 세상과 세속적 사고는 항상 나를 속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소통하시며 하늘의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힘들고 버거운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항상 넉넉히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택함을 받은 은혜를 지키며 승리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