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바스티안 바흐는, 노년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나빠졌고, 마침내 완전히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주변 “지인들이 모두 바흐의 아픔을 안타까워했는데, 오히려 바흐는 담담”했습니다. “내가 시력을 잃은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는 이제 음악에만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바흐는 “비록 시력을 잃었지만, 음악에 대한 깊은 열정과 집중으로 인해, 더 많은 곡을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현대인은 “나름대로 열정은 있지만, 집중력을 잃어서, 일상이 분산되어 무기력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특히 “팬더믹의 고통에서 살아남으려고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지만, 그 열정이 바른 방향으로 집중되지 않아서 몸만 피곤하고, 열매 없이 금방 지치고, 삶의 의미마저 잃어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사에서 아닥사스다의 술 관원으로 있다가, 고국의 개혁을 위해 돌아왔지만, 선민 공동체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벽과 예배가 무너졌고, 극심한 빈부격차, 율법이 금한 이방인과 결혼 문제 등등, 삶의 집중력이” 흐트러졌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철저히 구분하는 선택과 집중의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느헤미야는 율법의 교훈대로 이방인과 결혼을 금했고 동족 중 소외된 사람을 세우는 일에 열정을 다해 집중”했습니다. 지금은 “2021년을 정리하는 연말이기에 바쁘고 분주한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올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탄을 주셔서, 여러모로 분산될 수 있는 연말의 삶을, 세속적인 것보다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성탄은 “연말에 아기 예수께 더 집중하고 영적으로 무장해야 할 거룩한 절기”입니다. 얼마 “안 남은 2021년도! 우리가 세상이 아닌 거룩한 성탄에 집중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연말에 성탄에 집중하려면, 버릴 것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율법은 “선민이 하나님만 믿는 영적 순결함을 지켜야 하기에, 이방인과 결혼을 철저히” 금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돌아와 보니, 당시 사회에서 이방인과 결혼 문제는 보편화 되어서,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은,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다!” 말씀합니다. 분리하다. “원어 빠달은 미완료형으로, 이방인과 통혼 문제가 끝나기까지 계속 개혁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당시 “이방인과 결혼이 큰 문제였기에, 느헤미야는 열정을 다해 집중적으로 이를 정리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버려야 할 것을 과감히 버렸기에, 선민의 영적 회복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집중은 “한곳으로 모이게 하는 힘을 뜻”합니다. 어떤 “부부가 교회에 가는데, 갑자기 아내가 다리미를 안 껐다고 하여 귀가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음 “주에도 아내가 또, 이번에는 다리미를 진짜 안 껐다고 말해서 집에 갔지만, 역시” 괜찮았습니다.
다음 주일 “아내가 교회에 가며, 또, 다리미를 말하자마자, 남편이 ‘내가 이럴 줄 알고 다리미 가지고 왔어!'” 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이런저런 일이 너무 바빠서, 생각이 분산되어서, 무엇인가 하나에 집중하여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주일예배에 집중하는 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특히 “대림절을 지나 성탄에 이르는 연말은 평소보다 마음이 더 들뜨고 느슨해져서, 신앙생활에서 영적 집중력을 잃고 세상과 타협할 위험이 가장” 큽니다. 그렇게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서 집중력을 잃고, 악순환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탄은 세상의 미혹이 클수록 이를 버려야 하고, 오히려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께 집중해야 할 시기”입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기까지, 하나님은 든든한 보호자로 정혼자 요셉을” 세웠습니다.
남성으로 “사랑하는 여성이 자신과 무관하게 임신했기에,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당시 “마리아의 임신 소식이 알려지면, 파혼은 물론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까지, 철저히 성령의 음성에만, 마리아에게만 집중하여 정혼자와 아기 예수까지” 지켰습니다. 그렇게 “마리아와 요셉 둘 다, 세상의 소리보다 성령의 음성에 집중하여 순종해서,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무엇에 집중하는가보다 무엇을 기초로 집중해야 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선민은 율법을 먼저 들었고, 그 율법에 집중하였기에, 이방인과 결혼한 악습을 온전히” 끊어냈습니다. 이처럼 “가장 힘 있고 능력 있는 집중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집중하여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이 어둡고 실족이 반복되는 이유는, 말씀에 집중하기보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LA 시내에 “위치한 모자이크 교회는 코뿔소 교회로 유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코뿔소는 맹수도 피하여 도망갈 정도로, 강철같은 뿔과 갑옷으로 무장되어, 대부분의 장애물을 부수고 돌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모자이크 교회가 “코뿔소 교회로 불리는 이유는, 말씀을 집중하여 듣고, 들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강한 실천력 때문”입니다. 하나님 “주신 사명이라고 확신하면, 그 일에 철저히 집중하여, 토론과 회의보다 일단 실천하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여, 엄청난 실행력으로 사역을 추진하기에, 모자이크 교회는 더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 꼭 집중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고, 나중에 욕먹을 일이 없는지 눈치 보며 주저하다, 마침내 집중력과 열정은 물론 가장 좋은 시기마저 잃고” 맙니다. 성탄은 “우리 신앙과 삶이 흐트러질 수도 있지만, 반면에 말씀에 집중하여 성장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연말이니, ‘올해까지만 그대로 살고, 내년부터 하나님 기뻐하는 일에 집중하자!’ 타협하기도” 합니다. 팬더믹으로 “힘들었기에, 마음껏 마시고 먹고, 회포를 풀려는 일에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세속적인 것을 철저히 버리고, 아기 예수께서 오신 성탄에 집중하라!” 말씀합니다. 2021년 “거룩한 성탄을 맞이하며, 우리가 버릴 것을 버리고, 성령께서 명하시는 것에 집중함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우리가 연말에 성탄에 집중하려면, 주변에 소외된 이웃을 세워가야 합니다.
본문 10절은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다!” 말씀합니다. 당시 “레위인과 노래하는 자들은 선민이 드리는 십일조로 예배를 도우며 헌신했는데, 상황의 악화와 선민의 무관심으로, 헌신자들이 주어진 직무를 버리고 도망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선민이 동족의 아픔과 어려움을 외면하면서 예배가 힘을 잃었고, 영적 흐트러짐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를 알고, 다시 소외된 동족을 살리고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성탄은 “주께서 죄로 소외된 연약한 인간을 구원하려고 먼저 다가오신 사랑의 절기”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인 나에게 집중하여 주신 거룩한 성탄에, 매번 내 일, 내 기쁨, 내 성공에만 집중하여” 살아갑니다. 주변에 “소외된 영혼을 사랑해야 함을 잘 알지만, 내 일에만 집중함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2021년 성탄절에, 내게만 집중된 삶을 소외된 이웃을 세워가며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우리가 항상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구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명령하지만, 주님은 요 13: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내 몸처럼 타인을 사랑함을 넘어, 주께서 나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생각할수록 “주님께서 주신 이 계명은, 거룩한 성탄에 가장 필요한 명령”입니다. 성탄은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변에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에게 조금 더 집중해야 할 시기”입니다. 연말이면 “혹자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분주하지만, 혹자는 더욱 쓸쓸하고 외로울 수” 있습니다. 특히 “연로한 어른, 환우와 홀로 살아가는 이웃의 삶은 평소보다 더 외로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주변을 보면, 이처럼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바쁘고 분주하다고, 팬더믹으로 대면이 어렵다고, 나중에 하겠다고 다양한 변명과 핑계로 소외된 이웃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주변 지체를 향해 마음을 열면, 나와 주변 모두가 함께 성탄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상류층 귀족 계급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란 뜻”입니다. 과거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때, 로마 귀족은 평민보다 앞서서 납세의 의무를 더 많이” 이행했습니다.
로마 “귀족은 전쟁 중에, 사재로 전쟁 세를 신설하여 국가를”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일반인보다 더 많은 혜택과 힘을 가진 사람들의 솔선수범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처럼 혼탁한 세상에서 누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물론 “재벌과 권력자도 소외된 이웃에게 잠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이는 너무도 제한적”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우리만이 세상을 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성탄을 “맞으며, 우리가 주변에 사랑이 필요한 영혼들을 향하여 실제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최근 “가까운 목회자 한 분이 올해 한 해 동안, 거의 사례를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에 “당회는 지난 추수감사절 헌금 중 절반을, 티넥 주변 관공서와 주변의 어려운 교회를 섬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려면, 전화를 통하여, 금전적 도움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하며 관계를 다시 이어갈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실족한 분에게 사랑을 전해서 다시 주께로 이끌고, 믿음의 교제를 이어가며 함께 동역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가만히 있으면 나와 주변 모두가 소외되지만, 나부터 주님의 마음으로 주변 사람에게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일하시지!” 않겠어요? 지금 “내 주변에 누가 소외된 이웃이고, 누가 가장 먼저” 생각나세요? 성탄을 “맞으며, 우리가 그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고 마음을 열어 집중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