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사가 새로운 교회에 부임했는데, 교인 중 최 집사가 매사에 너무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하나님, 저 최 집사 좀!’ 간절히 기도하자, 어느 날 최 집사가 멀리 이사를” 갔습니다. 목사가 “너무 기뻤는데, 얼마 후 최 집사보다 더한 강 집사가 등록해서, 목사가 다시 기도”했습니다. “주님! 강 집사는 더 해요! 아시죠?” 그렇게 “얼마 후, 강 집사도 이사 갔는데, 바로 다음 주 강 집사보다 더 센 황 집사가 등록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땅을 살아가며, 하나가 아닌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힌 문제로 힘들어” 합니다. 내심 “지금의 고난만 끝나면 좋을 것 같지만, 생각지 않게 또 다른 아픔이 찾아오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설상가상의 세상을 살아가며, 혹자는 좌절과 절망으로 넘어지고, 혹자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더 성장하기도” 합니다. 연약한 “인간은 설상가상의 세상을 피할 수 없기에, 이를 이길 방법을 하나님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본문 18절은 “출애굽 선민이 송아지를 만들어서, 출애굽으로 이끄신 하나님을 모독했다!” 말씀합니다. 모독하다. “이를 어떤 성경은 ‘설만(褻慢)했다!’ 선민이 하나님께 심히 버릇없고 거만하고 무례했다.” 표현했습니다. 생각할수록 “다른 세대도 아닌 출애굽 세대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렇게 모독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 “하나님은 본문 19절에서,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셨다! 전혀 상반된 대응을”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돌과 바람, 극심한 일교차로 인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척박함을 상징”합니다. 당시 “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모독한 출애굽 선민은, 이처럼 광야 자체도 엄청난 심판이고 고난인데,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족한 출애굽 선민, 버림받아 마땅했던 선민을 설상가상의 세상에서 버리지 않고 사랑과 긍휼로 싸매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현실을 보면, 광야와 같이 척박하고, 마치 버림받은 것처럼 어렵고 힘든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삶, 설상가상의 힘든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이처럼 설상가상의 세상에서 우리를 싸매어 주고 구원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인데, 우리가 설상가상의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설상가상의 세상을 살아가기에, 우리는 항상 내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8절은 “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다!” 말씀합니다. 당시 “출애굽 선민이 송아지를 만듦은, 선민을 인도한 분이 누구인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 “선민은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보았고, 반석에서 물이 나고, 밤과 낮으로 구름과 불기둥의 은혜를 체험했고, 홍해에서 구원받고서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출애굽 “선민은 누가 그들의 삶과 세상 만물의 주인인지 제대로 몰랐던 것”입니다. 이에 “본문 18절은, 출애굽 선민은 한 번이 아니라 ‘또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반복하여 설상가상의 세상에 빠졌다.” 책망합니다. 본문에서 “포로에서 돌아온 선민은 출애굽 세대와 다르게, 참 주인을 바로 알기 위해 말씀 앞에 간절함으로 섰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도 선민처럼, 모든 것을 받고 누리면서, 내 삶과 천지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보다 물질과 권력, 명예와 자녀, 자존심과 알량한 지식을 주인 삼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참 주인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이 반복되기에, 우리가 실족하고, 소중한 삶을 허송세월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내 삶과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설상가상의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룻과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그들은 설상가상의 세상과 부딪혀야!” 했습니다. 당시 “나오미는 이방인 며느리와 동행했고, 나이 들어 기력도 없었고, 너무 가난했고, 환영할 가족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압 여인 룻은 설상가상의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며, 마침내 보아스를 만나 오벳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힘들었지만 “룻이 설상가상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주인 삼고 살았기에, 하나님은 룻을 다윗과 예수의 조상이 되도록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설상가상의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어정쩡한 신앙보다 확신으로 하나님만 주인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변종 바이러스가 발생하고 팬더믹 터널이 깊어도,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비록 “앞이 잘 안 보이고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이를 해결하실 분도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만 주인임을 알면서도, 상처받지 않겠다고 변명과 핑계가 점점 많아지고, 주님 주변만 맴돌고, 계산만 하다가 시간 낭비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열심히 믿으려는 분에게, 교회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 열심히 하지 말고 적당히 남이 하는 만큼만 해!” 말합니다. 유교의 “중용을 오용하여, 우리 신앙을 소극적으로, 참 주인을 놓치도록” 미혹합니다. 대관령 “정상에 비가 오면, 그 빗방울이 동과 서로 나뉘어” 흘러갑니다.

동쪽을 “향한 빗방울은 남대천을 통해 동해로, 서쪽을 향한 빗방울은 한강으로” 흘러갑니다. 빗방울은 “같은 곳에서 시작하지만, 미세한 방향 차이로 완전히 다른 바다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하나님을 주인 삼은 삶과 세상을 주인 삼은 삶,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삶은 처음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듯, 하나님을 주인 삼으면 영생으로, 반대의 삶은 영벌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 한 분만 주인 삼고 살아가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버림받지 않고, 설상가상의 세상에서 복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대림절은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기 위한 소중한 기회인데, 더욱 하나님만 주인 삼고 살아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더 신실해져야!” 합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인 오늘도 우리가 설상가상의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나님 한 분만 주인 삼고 살아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설상가상의 세상을 살아가지만, 누가 내 삶을 풍성한 은혜로 채우시는지 바로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8절은 “하나님을 모독했던 출애굽 선민의 어리석음을 크게” 책망합니다. 그러나 “본문 19절 이후는, 역설적으로 채우시고 공급하는 하나님 은혜와 사랑이 더 크다!” 강조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동사들에 동그라미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문 19절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여,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말씀합니다. 본문 20절은 “가르치시며, (만나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물을 주어” 말씀합니다.

본문 21절은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고” 말씀합니다. 본문 22절은 “(나라와 족속을) 나누어 주시고, 땅을 차지하였다!” 말씀합니다. 놀랍게도 “광야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설상가상의 현실에서, 하나님은 수많은 은혜와 능력을 선민에게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선민이 때마다 일마다 채우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몰랐기에, 그들은 실족하였고, 마침내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선민이 한결같이 채우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 은혜를 확신했다면, 그들은 설상가상의 현실을 능히 이겨 냈을 것”입니다. 이민자인 “우리는 저마다 다 표현하지 않아도, 힘들고 아픈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버거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내게 채우신 은혜와 사랑이 적지 않은데,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감사보다 불평과 원망이 더 많고, 비교와 질투로 광야에서 버림받은 인생처럼” 살아갑니다.

많은 “것을 받아서 누리고 있지만, 전혀 안 받은 것처럼, 부족한 것처럼, 더 받아야 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렇게 “풍성히 채우신 은혜를 모르기에, 우리 삶은 매번 설상가상의 세상에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채우신 은혜를 알면, 우리 인생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글을 소개”합니다. “가정에서 10대 자녀가 반항하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는 것이고, 내야 할 세금이 있다면 내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다.”

“파티 후 치울 것이 많다면, 친구와 즐겁게 시간을 보낸 것이고, 옷이 몸에 조금 낀다면, 내가 잘 먹고 잘산다는 뜻이고, 예배 중 타인의 찬양이 귀에 거슬리면, 내가 예배드릴 수 있고,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고, 난방비가 많이 나왔다면, 이는 내가 따뜻하게 잘살고 있다는 것이고, 새벽에 알람에 깼다면, 이는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팬더믹의 아픔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지금 내게 채워주신 은혜와 능력을 계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은혜와 능력의 근원을 아는 영혼은 불평보다 감사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은혜와 능력의 근원을 알면, 힘든 이민 생활에도, 설상가상의 세상에서도 절대로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지금 내 삶에 은혜와 능력을 공급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임을 바로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울과 “다윗은 똑같이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지만, 그 끝이 너무도” 달랐습니다. 사울은 “비참하게 죽으며 왕조가 끊어졌지만, 다윗은 메시아의 조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사울은 받은 은혜와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잊었지만, 다윗은 설상가상의 삶이 반복되어도, 항상 능력과 승리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다윗은 그 시작이 비슷했지만, 그 과정과 결과, 평가까지 너무도 달랐던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경건하게 기다리는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우리가 “내게 은혜와 능력을 채우셔서 내 삶을 바꾸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에,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더욱 하나님 주신 능력과 은혜를 더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 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설상가상을 이겨 내는 인생 여정”입니다. 한주도 “내게 능력과 은혜 주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설상가상의 세상을 이겨 내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