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영국의 웨일즈에서 일어난 대부흥 운동은 한국의 1907년 대부흥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 “웨일즈 대부흥 운동은 초라한 광부였던 이반 로버츠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반은 “그 삶이 척박했지만, 누구보다 말씀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서, 항상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설교로 전하기 원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마침내 “이반이 섬기는 교회에서 설교 요청을 허락하여, 불과 17명 앞에서 네 가지 요지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➀ 당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라! ➁ 삶에서 안 좋은 습관을 모두 버려라! ③ 성령의 음성에 즉각 순종하라! ➃ 주님을 전하기 위해 세상에 나아가라!” 짧고 “투박한 메시지였지만, 당시 기독교인이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들, 회개하는 삶, 악습을 버리는 삶, 순종하는 삶, 전도하는 삶을 강조하며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부흥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며, 불과 5개월 만에 웨일즈에서 무려 10만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Reformation은 “새로운 무엇인가의 시작이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하지만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회복하는 영적 운동을” 뜻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도 Ad Fontes!란 기치로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목적”이었습니다. 최근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이 영적 본질에서 떠나있고,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부터 회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선민이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새로워지는 개혁의 과정을” 말씀합니다. 당시 “개혁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처럼 걸출한 리더도 있었지만, 이보다, 선민이 그동안 잃어버리고 놓쳤던 것을 다시 찾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선민은 “포로로 고생하며 말씀과 국가, 영적 정체성, 뜨거운 회개의 눈물과 하나님 주시는 기쁨마저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선민이 잃었던 것들을 다시 찾으면서, 개혁을 넘어 부흥까지” 이어졌습니다.
개혁은 “제도와 외적인 것을 바꾸기보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잃은 것을 “모르기에,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고 방황하며” 삽니다. 종교개혁 “주일인 오늘! 개혁을 위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 무엇을 찾아야!” 할까요?
1. 개혁은 은혜받고 흘리는 감격의 눈물을 다시 찾아야 가능합니다.
본문 8~9절은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말씀합니다. 울었다. “원어 보킴은 잠시 운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느껴 울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서러움과 분노로, 부족함과 무능력으로 운 것이 아니라, 은혜받고 흘린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특히 “본문 9절은, 일부가 아닌 모든 백성이 이처럼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말합니다.
이처럼 “선민은 회개의 눈물, 하나님 주신 은혜를 받고 흘린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회복하며 개혁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중, 과연 얼마나 말씀을 듣고 감격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신앙생활을” 할까요? 생각해 보면 “처음 은혜받고 흘린 뜨거운 눈물이, 버거운 이민 생활을 지금까지 지탱해” 주었습니다. 고달팠지만 “말씀이 주는 감격, 기도의 응답, 주님의 함께함에 감격하며, 눈물로 신앙생활을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은혜받고 흘린 회개의 눈물, 감격의 눈물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언제 “회개의 뜨거운 눈물을 흘렸는지, 언제 내 눈물이 말랐는지, 기억조차” 없습니다. 심지어 “오늘 우리는 회개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영혼을 보고 ‘왜 저렇게 유난을 떨어! 창피하지도 않나!’ 오해까지”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은 잃어버린 회개의 눈물을 회복할 때부터 시작되고, 그 눈물을 회복해야 내가 기독교인답게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 11:17절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말씀합니다. 불행히도! “주님의 공생애 때도, 선민은 은혜와 감동의 눈물,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잃은 채” 살았습니다. 당시 “선민은 복음 앞에서 눈물로 회개해야만 했지만, 오히려 주님을 거부하고” 외면했습니다. 분명히 “개혁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지만, 무엇을 개혁해야 할지, 왜 눈물이 필요한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선민은 울어야 할 때, 분노하며 주님을 버렸고, 울며 회개해야 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잘 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도 은혜받고 흘리는 뜨거운 회개의 눈물보다, 미안해서, 후회해서, 안타까워서, 무기력해서 울 때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감정으로 인한 눈물은 잠깐 감정의 정화는 되겠지만, 내 삶을 바꾸어가는 개혁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최근 “저도 평소와 달리, 남모르게 참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매번 “교인의 장례를 집례하며 함께 아파하며 울었지만, 막상 제가 어려움을 당하고 보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도 막막”했습니다. 모친과 “여동생은 부친이 혼자 있다가 가셔서 불쌍하다고 많이 울었지만, 저의 눈물은 조금” 달랐습니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파킨슨병이 심해서, 저희 부친은 손을 잡아야 걸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부친 손을 잡는 것이 어색해서, 더 많이 못 잡아 드린 것이 죄송하고 마음에 큰 짐이” 됩니다. 파킨슨으로 “말이 어눌하셔서, 제가 답답하다고, 짧은 인사 후, 어머니를 찾았던 것도, 너무도 마음에” 걸립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눈물이 참 많구나! 그런데 왜 하나님 은혜에 감격하여 흘린 눈물이 적어졌을까? 교인의 아픔과 어려움에도 이렇게 울었나?’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고, 목사로서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어떤 “성도가 제게, 이번의 아픔이 이민 목회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위로했습니다. 그분의 “글을 받고, 내 삶의 개혁, 가정과 교회의 개혁은 목사인 나부터 잃어버린 눈물을 회복할 때 가능함을 깊이 절감하며 드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회개의 눈물, 하나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 한 소망 교회 성도를 사랑하는 눈물이 넘치게 하소서!” 개혁은 “어떤 거창한 제도와 프로그램으로 되지 않고, 회개의 눈물, 은혜의 눈물을 흘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내 죄를 씻어주신 은혜, 죄인인 나를 살려주신 은혜, 예수를 믿었다고 천국을 주신 은혜, 넘어진 나를 계속 일으켜 세워주시는 은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은혜에 대한 눈물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은혜받고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내 삶을 새롭게 바꾸어가고, 영적 본질을 회복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반면에 “은혜로 인한 눈물을 잃어갈수록, 나는 새롭게 되지 못하고, 영적 본질과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 주시는 은혜의 눈물, 뜨거운 참된 회개의 눈물을 회복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뜨거운 은혜의 눈물로 삶이 새롭게 되는 진정한 종교개혁의 승리가 우리 각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2. 개혁은 하나님 주시는 참 기쁨을 다시 찾아야 가능합니다.
본문 10절은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말씀합니다. 본문은 “선민이 이 말씀을 받고 모두 크게 기뻐했고, 그렇게 하나님 때문에 기뻐함이 선민에게 힘이 되었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성도의 힘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 하나님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속적 기쁨보다 하나님 주시는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사람마다 기쁨을 찾아 살아가지만, 문제는 그 기쁨의 성격과 가치가 각기” 다릅니다. 얼마 전 “금요일에 한 집사님이 제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아이들을 먹이고, 남은 것을 유년부실 냉장고에 두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피곤하실 때마다 하나씩 꺼내 드세요! 사모님께 말 안 할게요!” 문제는 “주중에 아이스크림만 생각하면 너무 기쁘고 마음이” 좋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이 주는 기쁨을 추구하며 살지만, 불행히도 이 땅이 주는 세속적 기쁨은 언제나 한계가 있고, 시간이 갈수록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세의 “한 수도사가 ‘Mea culpa! Mea culpa!’ 깊이 탄식하며” 살았습니다. 수도사는 “항상 신실하게 말씀대로 살았지만, 죄책감이 깊어 그 어떤 기쁨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 라테란 성당을 찾아서, 주께서 빌라도에게 심판받으며 올랐던 스칼라 상타를 무릎으로 기어” 오릅니다. 이유는 “당시 교황이 스칼라 상타를 무릎으로 오르면 9년간 죄가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으로 계단을 오르던 수도사에게 섬광처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에 “마틴 루터는 무릎으로 올라가던 계단에서 벌떡 일어났고, 하나님 주신 참 기쁨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주시는 기쁨, 하나님으로 인해 체험한 참 기쁨은 내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바로 “그 기쁨이 내 삶의 그릇된 것을 교정해 주고, 잘못된 길로 가는 내 삶을 바른길로 이끌어” 줍니다. 그 “기쁨이 악에 빠지는 내 삶을 개혁으로 이끌고, 새롭게 살아가도록 힘을” 줍니다. 문제는 “많은 영혼이 하나님 주시는 기쁨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 기쁨을 누리는 영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기쁨과 무관하게, 교회 마당만 밟고, 은혜 없이 습관적으로 신앙생활 하고, 작은 일에도 상처받고 허덕이는 영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주시는 참 기쁨을 체험하려면, 본문의 선민처럼, 더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와야!” 합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 장으로 동족에게 엄청난 피해와 아픔을 주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욕먹는 부자”였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재산이 삭개오에게 참 기쁨을 주지 못했기에, 삭개오는 마침내 주님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비록 “짧은 하루 동안 주님을 집에 모셨지만, 삭개오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고 체험한 참된 기쁨을 기초로,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역자로 헌신”했습니다. 주께서 “주신 참된 기쁨이 삭개오의 삶을 개혁했고, 사망에서 영생을 얻는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삭개오와 똑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 중 삭개오와 같은 기쁨을 누리는 영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유는 “아직도 하나님 주시는 기쁨보다 세속적인 기쁨을 더 좋아하고, 세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주시는 참 기쁨만이 내 삶을 개혁으로 이끌고, 기독교인답게 살아가게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 진짜 기독교인과 마당만 밟는 자칭 기독교인의 차이는 이처럼 하나님 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가치와 품격은, 무엇을 기뻐하는가, 무엇을 가까이하는가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러너의 말을” 소개합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기쁨이 “없는 시대에, 지금 여러분에게 참 기쁨은 무엇이고, 무엇을 기뻐하며 살아가야 할지!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아,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서 신령한 기쁨을 회복하고 경험하며, 참 개혁이 있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