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는 “누구나 연료가 떨어지면 주유소에 가고, 차를 세워두려면 주차장으로” 갑니다. 특히 “교회는 우리가 예배를 통해 은혜를 공급받는 영적 주유소”입니다. 상식적으로 “연료를 주유한 차는 도로에 세워두지 않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어떤 “운전자도 주유소에 차를 주차하지 않듯, 교회에서 은혜받으면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주일에 연료를 공급받고도 세상이 아닌 주유소 안에서 맴도는 신앙인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가 불량연료를 주유해서 차가 못 달린다! 영적 주유소인 교회에 많은 차가 너무 오래 주차되어서 폐차장이 되었다!” 조롱합니다. 차는 “멈추지 말고 달리는 것이 궁극적 사명이듯, 기독교인의 궁극적 사명은 은혜받고 세상에 나가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주신 궁극적 사명을 알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끼리 행복하게 지내기보다, 더 큰 사명을 이루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주신 궁극적 사명보다, 눈앞의 사소한 문제, 진리와 무관한 일에 발목 잡혀 살아갈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위해 귀국했지만, 그의 진짜 궁극적 사명은 무너진 성벽 재건 후, 예루살렘 성을 다시 회복하여 수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다시 거룩하게 예배드리는 성읍을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후, 예루살렘을 방비할 책임자를 세우며, 안전을 위한 준비도 철저히”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외적으로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우고, 내적으로 돌아온 포로를 영적으로 세우고 양육해서 선민의 미래를 새롭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람과 “공동체에 궁극적 사명이 있음은 존재해야 할 이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공동체가 궁극적인 사명을 추구한다면, 절대로 정체되거나 위축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궁극적인 목표를 잃은 공동체는 매사에 ‘여기가 좋사오니!’ 제자리걸음과 답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살아서 성장하는 공동체는 매번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고, 나아가서 궁극적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 달려갑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살리신 이유,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 사명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세우신 궁극적 사명은 무엇이고, 우리가 이를 이루려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와 교회가 잃지 말아야 할 궁극적 사명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은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다.” 말씀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후, 예루살렘 회복을 위해, 사람을 세워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 레위 인들을” 세웠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이며 동생인 하나냐를 세워서, 예루살렘 행정과 안정을” 준비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의 궁극적 사명은 성벽 재건 후 예루살렘 회복을 넘어, 하나님 사람들, 후손들을 세워가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건물과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공동체이기에, 우리 각자가 작은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든든하려면, 우리 각자가 하나님 사람으로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팬더믹을 겪으며 힘들고 어렵다고, 내 코가 석 자라고, 미래를 위해 사람을 세워가는 비전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을 세운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우리 자녀와 후세대를 하나님 사람으로, 복음으로 양육해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궁극적 사명인 영혼 구원을 위해, 우리 자녀를 세우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을 길러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사람을 세워가기보다, ‘여기가 좋사오니’ 변화를 거부하고, 작은 오해와 무의미한 경쟁에 빠져 궁극적 사명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람을 세워가려면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자녀와 주의 일꾼을 복음 위에 세워가려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후세와 인재를 세워가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격려하며 덮어주고, 이해해 주고, 언제나 한결같이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애틀랜타에서 “사역할 때, 개업예배를 참석했는데, 담임목사님이 제게 기도를 시키지 않아서, 긴장이 풀려서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게 축도를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내가 “급히 깨워서 일어나서 두 손을 들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다가, 겨우 축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어떤 장로님이 제게 ‘목사님! 그렇게 잠깐 기도 후 축도하니 더 은혜가 컸어요!’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장로님의 덮어주고 격려하신 말을 생각하면 큰 힘과 위로를” 받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녀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진심이 가득한 기도, 게다가 살아 있는 복음이 그 심령에 들어가면, 얼마나” 귀할까요?
다음으로 “우리가 후세대를 세워가려면, 실제적이며 영적인 투자, 물질적 투자도” 필요합니다. 최근 “많은 교회와 가정이 팬더믹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우리 자녀를 위해 합력해서 물질적으로 투자하고 섬겨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대상 22:14절은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준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말씀합니다. 이는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한 엄청난 양의 물질을” 말씀합니다.
다윗은 “자녀인 솔로몬과 후세를 위해 물질과 시간, 마음과 정성을 다 쏟아부으며” 헌신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거룩한 투자를 기초로, 7년 6개월간 매년 183,850명과 엄청난 재물을 더해서 거룩한 성전을” 완성했습니다. 마음과 “뜻을 다한 다윗의 봉헌이 작게는 솔로몬의 삶을 바꾸었고, 크게는 이스라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후세대를 세우기 위해 예산을 더 책정함도 중요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중, 다윗처럼 마음을 다하는 봉헌, 온전한 십일조와 믿음으로 물질을 드려 후세를 양육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림은, 교회 재정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우리 자녀를 말씀으로 세워야 함이 궁극적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감사함으로 온전히 봉헌한다면, 그 물질이 우리 자녀를 위해 바르게 쓰인다면, 우리 자녀가 더 복음적이고 탁월한 프로그램, 더 효과적인 교육으로 굳건하게 서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마음과 뜻, 힘과 정성을 다해서 온전히 봉헌하여, 선물로 주신 우리 자녀를 키우는 일, 궁극적 사명을 위해 더 합력하기” 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 목표는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은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말합니다. 여기서 “사로잡혀 갔던 자들은 과거 세 번에 걸쳐 이방에 포로로 끌려간 선민을” 말합니다. 또한 “놓임을 받고 돌아온 영혼은 고레스 칙령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영혼을” 말합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느 7:6~73절에서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을 일일이 빠짐없이 이름과 가문을” 말했습니다.
느헤미야의 “궁극적 사명은 포로로 끌려갔던 선민이 몸만 돌아오기보다, 영적으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 사명은 후세대를 세워가는 것은 물론 잃어버린 영혼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 10:16절에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해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직 우리에 들지 않고, 돌아와야 할 양이 있다!”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교회 밖의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길 원하기에, 우리도 이것을 궁극적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하나님을 믿어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영혼이 너무 많고, 자신이 돌아와야 할 대상인지도 모르는 영혼이 참으로” 많습니다. 기독교인의 “궁극적 사명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어렵고, 많은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돌아와야 할 영혼은 주변에 너무 많은데, 우리가 그들을 주님께 되돌리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심지어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사소한 문제로 오해하고, 마음을 닫고, 돌아오려는 사람에게 상처 줄 때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친한 사람끼리만 편당을 짓고,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은 싫어해서, 주께서 주신 궁극적 사명을 외면한 채” 살아갑니다.
신실한 “기독교인 잭 밀러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신앙생활 중 전도를 제일 어려워” 했습니다. 잭 밀러의 “마음에는 전도하려는 열정, 영적인 간증도 많았지만, 사람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가 너무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비록 “실제로 전도하지 못했지만, 마음에는 항상 어떻게 전도를 하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잭 밀러는 아주 기상천외한 방법을 찾았는데, 농장 근처의 호수에 매년 날아오는 거위를 이용한 전도 방법”이었습니다.
잭 밀러는 “호수에서 거위를 잡아, 그 다리에 성경 구절과 쪽 복음을 묶어서 날려” 보냈습니다. 매년 “200마리 정도의 거위를 통해 전도했는데, 놀랍게도, 엄청나게 먼 지역에서까지 많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죽어가는 영혼을 돌이키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최선을 다하면, 그 후부터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문제는 “전도할 방법과 복음을 전할 사람이 있지만, 내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는 열정이 부족한 것”입니다.
주변에서 “주께로 돌아와야 할 영혼 중, 내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주께로 돌이키려면, 우리가 힘들어도 진리 문제가 아니면, 그들에게 져 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9:9절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말했습니다. 바울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되어서 져 주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을 주께로 되돌리려고 고기도 먹지 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하고 싶은 일조차 하지 않으면서, 진리와 생명 문제 외에는 항상 져” 주었습니다. 영적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사람을 되돌리려는 싸움에서는 주님의 마음으로 오히려 져 주어야, 사랑하는 사람을 주께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져 준다는 것은 비굴하거나 무능력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궁극적 사명을 위해서 일부러 지는 거룩한 패함”입니다.
단 12:3절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말씀합니다. 생각할수록 “사람을 주께로 되돌리는 곳에 쓰임 받는 것처럼 귀한 일이”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사람을 주께로 되돌리는 능력은 그 무엇보다 내 삶이 바뀌는 만큼” 커집니다. 한주도 “교회와 우리 각자가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서, 하나님 주신 궁극적 사명을 이루어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