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호주 콴타스 항공 CEO 제프 딕슨은 ‘우리 시대의 역설’이란 글에서 과거와 달라진 현대인의 삶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그 가치는 더 줄었다. 말을 많이 하지만 사랑은 식었고 거짓이 더 많아졌다. 돈 버는 법은 더 많아졌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다. 장수하게 되었지만, 삶의 가치는 잃어버렸다. 달에 갔다 왔지만 가까운 이웃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외계를 정복했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무려 “20년이 지났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현대인은 여전히 삶의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며 흔들리고 있음을” 절감합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는 매사에 흔들리는 것이 계속 많아지면서, 영적인 굳건함마저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흔들리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사람을 잃고, 하나님 주신 기회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영적 굳건함이 느슨해지면서, 각자의 삶과 가정, 교회와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도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느 5장은 “성벽 재건을 마치고 12년 후, 느헤미야가 선민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했던 갈등과 다툼을 지혜롭게 해결했음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느 6장은, 말씀의 배경이 다시 12년 전, 성벽 재건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특히 “본문 1절은, 당시 시간적 배경을, 아직 성문의 문짝을 달지 못 한 때로” 말씀합니다. 유대인은 “건물과 집을 건축할 때, 공사 끝에 문짝을 다는 전통이 있어서, 본문의 상황은 성벽 재건 공사 막바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적들은 공사를 주도하는 느헤미야를 끊임없이” 협박했습니다. 계속 “느헤미야에게 만나자고 미혹했고,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냈고, 느헤미야가 반역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성벽 재건 공사를”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 주신 사명을 붙들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마침내 성벽 재건 공사를” 마쳤습니다.
인간은 “연약하지만, ‘지금 내가 영적으로 흔들리는가? 아니면 굳건한가?’ 이에 따라, 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삶이 전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굳건하여 “흔들리지 않으면 집중할 수 있고, 직진할 수 있고, 이 땅과 사후까지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부터라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할 수 있다면 내 인생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남은 인생이 영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계속되는 다양한 미혹에 속지 말아야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느헤미야의 영적인 뚝심도 대단했지만, 끝까지 느헤미야와 선민을 미혹하는 대적자의 완악함도 참으로” 대단합니다. 대적자는 “느헤미야를 해하려고, 무려 네 번이나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게다가 “산발랏은 다섯 번째 미혹으로,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내서, 느헤미야가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편지는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하여 밀랍으로 굳게 봉해서 보내는 것이 관례였는데, 왜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대적자들이 밀봉하지 않은 편지로,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을 반역하려 한다는 소문을 공개적으로 퍼뜨리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본문 9절은, 대적자가 느헤미야와 선민을 괴롭힌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려고! 일하는 손이 피곤하여 공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문제는 “그래도, 느헤미야와 선민은 계속 이어지는 미혹과 영적 공격에 속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고 굳건함으로 이를” 이겨냈습니다.
오늘 “우리 입술에는 ‘은혜받았다. 믿음으로 살아보겠다!’ 보다 ‘시험 들고 상처받았다. 더는 못하겠다. 그만두고 싶다!’ 흔들림이 더” 많습니다. 불행히도 “생명의 말씀, 영생의 복음, 최후의 승리를 약속받고 살면서도, 실제 삶은 매번 실족하고 넘어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흔들리고 굳건하지 못해서 은혜를 놓치고, 심지어 흔들리고 굳건하지 못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실족하고 흔들리는 것”일까요?
이유는 “마귀의 미혹과 공격이 많고 극심한 것보다, 내가 한 번의 미혹, 작은 미혹에도 너무 쉽게 속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악한 미혹을 이겨낸다면,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할 수” 있습니다. 환언하면, “속이는 의도, 속이는 대상이 악하지만, 정말 문제는 너무 쉽게 속는 나, 그래서 흔들리고 실족하는 내게” 있습니다. 집회 때 “강사 목사님이 침대에서 새우깡과 탄산음료를 먹어야 잠을 잔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나도 한번 해 볼까?’ 말했다가 욕만” 먹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새우깡과 탄산음료가 나쁜가요? 아니면 아닌 줄 알면서, 일부러 침대에서 새우깡과 탄산음료를 먹는 내가” 나쁜가요? 집회 중 “강사를 접대하며 살이 조금 쪘는데,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이 나쁜가요? 아니면 절제하지 못하고 ‘오늘까지만, 이번만’ 말하며 먹는 제가” 나쁜가요? 뱀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를 줄 만큼 탐스러운 선악과로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뱀이 “악했지만, 더 큰 문제는 미혹에 굴복하여 범죄 한 하와가” 아닐까요? 만일 “미혹한 뱀이 나빴다면, 하나님은 뱀만 책망하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남겨 놓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넘어뜨리려는 미혹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겠지만, 하나님은 이에 속지 말고 굳건한 믿음으로 살라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강권합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이처럼 반복되는 미혹에 어떻게, 무엇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할 수” 있었을까요?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철저하고 온전하게 신뢰하고 맡기는 믿음으로 미혹을 극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이끌고 승리하게 한다는 신뢰가 느헤미야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대적의 미혹과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으로, 끝까지 성벽 재건을 마쳤던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려면, 비록 미혹이 계속 다가와도, 오히려 미혹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앞서가심, 하나님의 일하고 책임지심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혹보다, 이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 신뢰할 때, 더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비록 “연약해도, 많이 배우지 못해서 부족해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르게 신뢰하면, 영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굳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되는 미혹에도 하나님을 신뢰한 느헤미야와 선민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사울의 “악한 계획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신뢰한 다윗을 끝까지 책임져” 주셨습니다. 수많은 “고난에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한 바울을 통해 유럽의 운명을” 바꾸셨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와 다윗, 바울의 하나님이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한주도 “우리가 영적 굳건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계속되는 미혹에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더 집중하며 헌신해야 영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굳건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대적자의 끊임없는 미혹과 공격에 일일이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악한 미혹에 응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일에 더 열정적으로” 헌신했습니다. 본문 3절에서 “느헤미야는 대적자의 계속되는 미혹에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또한 “아닥사스다 왕을 배신할 것이란 미혹에도, 여전히 주어진 일에 계속” 충성했습니다.
심지어 “본문 9절에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며 영적으로” 무장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끊임없는 미혹에도 하나님 일에 더 헌신했을 때, 악한 공격을 이겨냈고, 성벽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미혹에 직면하면, 기도와 말씀보다, 오히려 눈앞의 미혹과 고난에 더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렇게 “미혹에 끌려다니다가 무엇을 할지, 어떻게 이겨낼지, 생각하지 못하고, 흔들리다가 실족하고” 넘어집니다.
불행히도 “미혹 자체보다 더 큰 낙심과 좌절에 빠져서, 그동안 쌓았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지난 “09-01, 불과 5시간의 엄청난 폭우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혹자는 “27시간 동안 못 자고 물을 퍼내서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혹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피해 상황을 보고 망연자실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환난과 고난 중, 가만히 있는 영혼과 무엇인가를 행하는 영혼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 삶에 고난과 미혹이 계속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 기뻐하는 일에 더욱 헌신한다면, 우리 미래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열치열, 열로 다른 열을 다스린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이처럼 “삶의 미혹과 시험은 절대로 인력으로 이길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해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미혹에도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할 때, 막막한 중에 새로운 것이 보이고 들리며, 새로운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에서 강연을 마쳤는데, 한 여성이 테레사 수녀를” 붙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자살하려고 합니다. 도저히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이 말을 듣고, 여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살 전 한 가지를 제안할게요! 한 달만 인도 캘커타에 와서 나와 일한 후 자살하세요!” 여성은 “이 제안을 수용하고, 테레사 수녀를 따라 인도 캘커타에 갔는데, 여성은 캘커타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오랜 “기아와 질병으로 까맣게 말라 죽어가는 그들을 부지런히 돌보고” 섬겼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여성은 살고 싶어졌고 ‘내게 살만한 이유가 있구나!'”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이 여성은 하나님 기뻐하는 일에 헌신하면서 자살 충동을 이겨냈고, 테레사 수녀와 함께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세울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혹과 낙담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무기력하고 넘어지는 것, 지레 겁먹고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우리 삶은, 현재 팬더믹은 물론, 너무도 많은 미혹과 고난으로” 힘들었습니다. 어떤 “고난은 정말 죽을 것 같았고, 희망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하나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연히 “남은 삶에서도 생각지 않은 고난과 미혹, 악의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너무도 잘 알기에, 힘들고 어려울수록, 사방이 막힐수록, 오히려 더더욱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먼저 찾고, 헌신하는 열정이 필요”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하나님은 미혹에 빠져 허덕이는 영혼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찾아서 헌신하는 적극적인 영혼을 통해서” 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핑계와 변명을 찾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하나님 기뻐하는 것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변명했다면 공감은 얻었겠지만, 하나님 주시는 상급과 복은 못 받고 못 누렸을 것”입니다.
힘들었지만,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먼저 택했기에, 아들을 살렸고, 복의 근원이 되었고, 가정과 믿음이 더 든든해 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어떤 일로 어렵고” 힘드세요? 무엇을 “해야 이 미혹과 고난을 이길 수” 있겠어요? 승리는 “내 생각보다, 하나님 기뻐하는 방법을 먼저 찾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한주도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먼저 찾고 그 일에 헌신하여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