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부 세미나에서 남편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외로운 삶과 무능하다고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삶,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답변을 보니 “94%가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외로운 삶을 선택했고, 6%만 아내에게 무시당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남편 “대부분은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외로운 삶은 참아도 아내에게 무시당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삶은 살 수 없다고’ 답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변 모두에게 ‘잘 한다! 당신이 필요해! 당신이 있어서 힘이 돼!’ 존중받으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존중보다 차별과 무시가 많아서, 곳곳에서 금수저 흙수저 갑을 관계, 존중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세계 곳곳에서 인권 문제가 크게 부각 됨은, 존중이 그만큼 사라져감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12년간 총독으로 일하면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땅히 받아야 할 월급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개인적인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고, 심지어 선한 정책을 위해서 손해마저” 감수했습니다. 실례로 “과거 총독은 본인과 종들조차 자기 욕심을 차렸지만, 느헤미야와 그 종들은, 오히려 꼭 해야 할 일에 헌신하고, 심지어 이방 민족까지” 챙겼습니다. 이유는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은혜받고,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선민은 그런 느헤미야를 진심으로 존중했고, 하나님도 느헤미야를 존귀하게” 쓰셨습니다. 짧지 않은 “12년 동안 성벽이 무너졌고, 지배층의 악행이 극심했고, 분열과 다툼이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모두에게 존중받으며”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세상이 교회와 기독교인을 신뢰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하며” 배척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기독교인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물론 세상 어디서나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불행히도 “많은 분이 존중받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도 존중받기 원하고, 존중받지 못하면 상처받고 세상을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존중은 억지로 되지 않고, 잠깐의 노력으로도 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살아온 삶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한 소망 교회가 “항상 견고한 반석 위에 서려면, 먼저 우리 각자가 교회와 가정, 세상에서 존중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에서 존중받으며 살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모두에게 존중받으며 살아가려면, 내 이익보다 모두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과거 총독과 그 종들이 백성을 어떻게 압제했는지 말하며, 본문 16절에서, 그들과 다른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합니다.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게다가 “본문 17~18절은 느헤미야가 매일 약 150명가량의 유대인과 이방인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자기 개인의 이익과 편안함보다 공동체와 국가, 모두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일부 악의적 적대자를 빼고, 주변 모두와 하나님께 크게 존중받으며” 살았습니다. 세상은 “팔은 안으로 굽는다며 항상 내 이익, 내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 내 사람을 먼저 챙기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존중받는 기독교인은 내 이익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교회와 주변 모두의 이익을 먼저 챙기며” 살아갑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은 돈을 받고 수고하기보다, 은혜받고 자원봉사로” 이루어집니다. 건강한 “교회는 내 개인적인 것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헌신자가 많지만, 미숙한 교회는 내 이익, 내 이름을 먼저” 생각합니다. 오늘 “주일 예배를 위해서도, 수많은 사람이 개인보다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하심을” 아세요? 교회를 “먼저 생각하여 식당에서 굵은 땀을 흘리고, 이름 아침부터 교회 현관을 지키고, 우리 자녀를 가르치며” 헌신합니다.
모두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빵을 사서 성도들을 섬기고, 기쁨으로 찬양을” 준비합니다. 특히 “교회의 각종 위원회를 보면, 전문 지식을 가지고, 교회와 성도를 위해 시간을 내고, 헌신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가 교회와 모두의 이익을 위해 먼저 헌신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고,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상처가 컸지만, 훗날 형들과 그 자녀와 가족까지 모두를” 챙겼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이익, 개인적 원한보다 모두의 이익, 모두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요셉을” 존중했을까요? 하나님이 “지금 내게 주신 은혜와 달란트, 시간과 건강, 능력은 모두 나 하나만을 위함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5000명분의 은혜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영혼이 있는 반면에 5000명분의 은혜를 가지고 본인은 물론 남도 제대로 못 쓰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어떤 삶의 자세가 주변에 덕을 끼치고 생명을 살리고” 존중받을까요? 하나님께서 “한 영혼이 자기 이익보다 교회의 이익, 모두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며 살아갈 때,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 모두에게 존중받도록 이끌지!” 않겠어요? 가가와 도효히코 “목사는 고위 공직자인 아버지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고, 불과 다섯 살에 어머니를 전염병으로” 잃었습니다. 항상 “본부인 자녀에게 핍박과 억압을 받으며 암울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가가와 목사는 청년기에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후, 평생 빈민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안수받고, “특히 중국에서 빈민 사역에 헌신했는데, 그 수고와 헌신이 모두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었습니다. 특히 “장개석 총통의 아내 송미령 여사가 가가와 목사의 빈민 사역을 듣고, 함께 성경을 공부하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중국 내 일본인 200만이 귀국하며 한 명도 중국인의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장개석 “총통이 가가와 목사가 개인의 이익보다, 진심으로 중국인을 위한 수고를 듣고, 이에 보답하여 내린 포고령 때문”이었습니다. “귀국하는 일본인을 절대로 해치지 말라!” 장개석 총통은 “일본의 난징 학살로 중국인 30만이 죽었지만, 이보다 가가와 도효히코가 자기 이익보다 중국인을 위한 헌신을 보고, 이처럼 선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모두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때, 개인적 존중은 물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보다, 죄인인 저와 우리를 먼저 생각하여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이타적 사랑으로 구원받았기에, 우리도 내 이익보다 교회와 타인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두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가정과 자녀들, 미래를 은혜로 채워주지” 않겠어요? 한주도 “힘들고 어렵지만, 내 이익보다 모두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여, 모두에게 존중받으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2. 모두에게 존중받으며 살아가려면, 하나님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만들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9절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말씀합니다. 이는 “느헤미야가 사람들 앞에서 자화자찬하기 위한 고백이” 아닙니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12년간 총독으로 헌신하며, ‘어떤 일이 아니라, 모든 일을 기억해 달라!’ 하나님께 당당하게” 요청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12년간, 총독으로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 주신 시간과 권력, 물질과 달란트, 건강과 기회를 악용하지 않고 신실하게 선용했음을 자신 있게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 “대부분은 자녀에게 ‘나처럼 살아라!’ 보다 ‘나처럼 살면 안 된다!'” 말합니다. 이유는 “많은 부모가 자기 자신을 볼 때, 당당하게 내세울 일보다 감추고 싶고, 부끄러운 일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팬더믹을 지나며, 우리는 나의 신앙과 영적 태도에 관하여 점점 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래도 무엇인가 했다고, 이것만은 했다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될까요? 부족해도 “우리가 누군가에게, 교회에서, 직장과 자녀에게 ‘그래도 무엇인가를 했다고, 이것만은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할까요?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를 했다고’ 말하기가 너무도 부끄러워” 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내 연약함과 불신, 게으름과 나태함에 너무 깊게 빠져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나도 나를 존중하지 못하고, 하나님은 물론 누군가의 존중도 아예 기대하지 않고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고전 11:1절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누구도 이처럼 당당하게 나를 본받아라! 말하지 못했는데, 죄인 중 괴수라 자칭한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말했을까요? 비록 “고난과 박해가 컸지만, 하나님 교회와 복음 전파를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이처럼 당당하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첫사랑을 체험했을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얼마나” 뜨거웠나요?
하지만 “오늘 우리는 팬더믹에 위축되어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시험과 상처 때문에 뜨거웠던 첫사랑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주어진 일에 힘있게 헌신했는데, 이제는 점점 그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내가 이렇게 했어! 말할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할 말이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이 상처와 시험들, 미워하는 사람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싫어서 꼭 해야 할 일에서 벗어나”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나의 죄 성과 부족함을 알지만, 그래도 지금 잘 하는 것, 과거에 잘 한 것 모두를 기억하셔서 내 인생에 복과 존중을” 주십니다. 2001년 “어떤 여성이 홀로 10세 13세 된 아들들을 데리고, 미국에서 이민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홀로 “형제 둘을 키우면서 먹고 사는 문제, 신분 문제, 말 못 할 아픔 등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분은 그렇게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매일 새벽 제단을 신실하게 지키며, 본인과 교회를 위해, 무엇보다 사랑하는 두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장남은 맨해튼에서 Fund Manager로 일하고, 차남은 변호사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남은 “새벽마다 엄마가 잠자는 자기 종아리를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자다가도 자기 종아리에 흐르는 눈물을 잊을 수 없고,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진심으로” 간증했습니다.
어머니도 “힘들고 어려워서 아들들에게 좋은 것을 못 먹이고, 좋은 옷을 못 입혔지만, 기도만큼은 정말 간절히 했다!” 간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힘들고 어렵다고, 문제가 나를 아프게 한다고 하소연만” 합니다. 실제로 “어려움과 아픔에 함몰되어, ‘내가 우리 자녀와 교회, 누군가에게 이런 일을 했다고!’ 말할 것들이 줄어간다면, 이는 하나님이 아닌 바로 내게 가장 큰 손해”입니다. 다행히도 “아직 안 늦었기에, 지금부터라도 자녀에게, 가정과 교회에서, 직장과 인간관계에서, ‘그래도 내가 이 일은 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도록 내 삶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처럼 “무엇인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려면, 내 삶의 기초에 하나님 말씀, 십자가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믿음 안에서 가정과 교회, 인간관계에서 성령의 지시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그래도 이렇게 했어요!’ 이 고백이 반복되면 내 인생은 달라지고, 모두에게 큰 존중을 받을 것”입니다. 한주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을 하나씩 쌓아가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