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알코올 중독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훗날 형은 아버지처럼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동생은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이에 “누군가가 형에게, 알코올 중독자가 된 이유를 묻자, ‘술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이죠! 그 피가 어디 가겠어요?'” 답했습니다. 이번에는 “동생에게 변호사가 된 이유를 묻자, ‘아버지 덕분이죠.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아들의 답변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버지 때문이죠! 아버지 덕분이죠!’ 형제의 답변은 우리가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지, 귀한 도전을” 줍니다. 인생은 “BCD인데, Birth와 Death 사이에 Choice가 있어서, 선택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음을” 도전합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주셨고, 각자 그릇에 맞는 은혜를 주셨지만, 모두 다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지금 내 선택에 따라 현재와 미래의 인생까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선택의 비결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무너진 “예루살렘이 본격적으로 재건되면서, 느헤미야와 대적자의 영적 전쟁이 더” 깊어졌습니다. 당시 “대적자는 느헤미야와 모두를 비웃고 조롱하며” 방해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민이 느헤미야와 대적자의 치열한 영적 전쟁 중 누구를 선택했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6절은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말씀합니다. 다행히 “선민은 느헤미야를 선택하여 무너진 예루살렘의 재건이 이어져”갔습니다.
우리 “삶에서 선택의 순간이 너무도 많은데, 선택도 습관임을” 아세요? 생각할수록 “악한 선택은 계속 악한 선택을 낳고, 선한 선택은 계속 선한 선택으로 이어져” 갑니다. 그래서 “지금 내 선택에 따라 내 신앙생활의 영적 부익부 빈익빈이 점점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한결같이 내게 하나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가르쳐주는 이유는, 내가 악한 세상에서 그릇된 선택이 아니라, 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팬더믹 이후 펼쳐질 New Normal 시대는 어쩌면, 우리가 더 많은 선택 앞에 서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선한 선택과 악한 선택이 주는 결과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아직 안 늦었고, 여전히 선택의 기회가 많기에, 저는 여러분이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선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더 나은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갈지!” 살펴봅시다.
1. 내가 하나님 편과 하나님 반대편 중 어디에 서야 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산발랏이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고, 도비야는 곁에서 산발랏을” 거들었습니다. 반면에 “본문 4절에서, 느헤미야는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당시 “대적자는 사람들을 충동하려고 사람들을 향했지만, 느헤미야는 철저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처럼 “같은 장소, 시간, 상황이었지만, 느헤미야와 대적자는 바라보고 말하는 대상, 의지하는 대상이 너무도” 달랐습니다.
대적자는 “세상 편에 섰지만, 느헤미야는 하나님 편에 섰고,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나님 편에 선 느헤미야에게 은혜를 주셔서, 무너진 예루살렘을 회복하게” 도우셨습니다. 현대 “교회와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세상 편에 서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많은 기독교인이 하나님보다 세상이 주는 복과 특권을 더” 사모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히 헌신하라 하는데, 우리는 세상에 속해서 군림하며 큰소리치기” 원합니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은혜보다, 물질과 명예, 성공과 권력을 붙잡으려고 세상 편에 설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악한 “세상이 하나님보다 내가 편하고, 내가 좋은 대로, 내 위주로 선택하며 살아가라고 미혹하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서 이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수 24:15절은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말씀합니다.
선민이 “출애굽 했지만, 40년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율법을 듣고 공부하며, 하나님 편에 서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민 공동체가 들어갈 가나안은 만나와 율법이 있었던 광야와 달리,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당시 “여호수아는 선민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아닌 가나안 문화를 선택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죄인인 인간은 가나안 편에 서서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줄 만큼 탐스러움에 빠질 가능성이 참으로” 높습니다. 이제 “우리는 팬더믹을 통과하며,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기에, 바른 선택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마귀는 “나에게 편안하고 안일한 예배로 유혹해도, 나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선택해야!” 합니다. 더욱 “봉사와 헌신을 택하고, 눈앞보다 멀리 바라보고, 나 개인보다 전체를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 편에 서면 안 되고, 넘어지고 실족함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힘들어도,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반드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이유는 “내가 세상 편에 선다고 세상은 내 편이 되지 않지만, 내가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남북전쟁 중 어려울 때마다 각료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 번은 “기도 중에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한 각료가 이렇게” 말합니다.
“대통령님! 이렇게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자 “링컨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답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항상 편을 갈라서, 나를 긍정하고 인정해 주면 내 편이고, 나를 반대하면 적으로 간주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족해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면, 우리 하나님께서 항상 내 편이 되어 나를” 도우십니다.
물론 “이 땅을 살아갈 때, 생각지 않은 고난과 아픔, 상처와 시험이, 내가 하나님 편에 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힘들게”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가 바른 선택으로 그 방해를 이기고, 더욱 세상과 사람이 아닌 하나님 기뻐하는 곳,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편에 서야 말씀이 들리고, 막혔던 길이 열리고, 새로운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면 나 혼자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과 책임지심의 은혜가” 뒤따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서, 새로운 힘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한 번뿐인 인생에서 세상 편에 서면 백전백패하지만, 하나님 편에 서면 백전백승함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팬더믹을 “통과하며, 나부터 세상과 사람이 아닌 하나님 편에 서서, 한주도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내가 믿음이 흔들리는 쪽과 굳건한 쪽 중 어디에 서야 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유대인을 비웃고 조롱하며, 갖은 말로 미혹하며 힘들게” 했습니다. “불탄 돌을 흙더미에서 다시 일으키려 하는가? 너희가 세운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거야!” 이들이 “이렇게 악하게 선동한 이유는, 우선 예루살렘 재건 사역을 흔들고, 나아가서 이를 위해 수고하는 선민을 흔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선민은 미혹에 흔들릴 수 있고, 굳건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그들은 굳건함을”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선민이 굳건함을 택했기에, 대적자는 말이 아닌 행동까지 동원하여 선민과 그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영적으로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원하지만, 현실을 보면, 굳건한 믿음보다, 쌓았다 다시 부수는 흔들리는 신앙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심지어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믿음이 반복되면서, 흔들리는 믿음에 점점 익숙해지고, 나아가서 문제의식조차 잃어버리고, 마침내 아예 흔들리는 믿음에 갇혀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친구에게 경찰차를 영어로 묻자, Police Car, 소방차는 Fire Car, 이어서 병원차를 물으니, 앰뷸런스를 Hospital Car라고” 답했답니다. 문제는 “내가 굳건한 믿음보다 매번 흔들리고 어정쩡한 믿음을 택하고, 그 안에 갇혀서, 마침내 굳건한 믿음을 택함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지, 그 가치와 능력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레몬서와 골로새서, 빌립보서와 에베소서, 옥중 서신을” 썼습니다. 당시 “바울이 투옥된 것은 죄와 악함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도 “인간인데, 매사에 제한적이고 자유도 없는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게다가 “억울한 비방과 거짓 소문을 들을 때, 그 낙담과 좌절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도 “바울이 영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굳건함을 선택했기에, 옥중 서신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억울하고 힘들어도, 영적 굳건함을 택했기에, 바울은 본인도 살고, 주변도 살리고, 수많은 영혼을 살리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은혜를 줄 수” 있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내 생각과 기대와 다를 때, 억울함과 불공평함을 느낄 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흔들릴 수 있지만, 문제는 흔들려서 얻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들려서 “문제가 해결되고, 심적으로 평안해지고, 더 많은 것을 얻었다면, 계속 흔들림을 택해야!” 맞겠지요.
그러나 “믿음이 흔들리면, 영생을 잃고, 내가 쌓은 모든 것을 잃고, 주변 사람까지도 잃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이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은 굳건한 믿음으로 산다고” 착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 범죄가 어렵지 두 번째부터 쉬워지듯, 우리가 계속 굳건함보다 흔들림을 택하면, 흔들림의 물꼬가 터져서,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들수록, 하나님만 바라보고 더더욱 영적 굳건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의 “비극은, 목회자는 물론 많은 기독교인이 굳건한 믿음보다, 자기도 모르게 흔들림을 택하면서도, 큰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거 “한국 교계 중진 목회자들이 남한산성에 거하시던 한경직 목사님의 병문안을 위해” 방문했습니다. 대화 중, “어떤 목사님이, ‘목사님! 모처럼 교계 중진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좋은 말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말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한참 생각하시다 간곡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당시 “많은 목회자가 이 말을 듣고, 당황하면서도 큰 깨달음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목회자도 예수 잘 믿는 믿음에서 흔들릴 수 있음을 경고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도 역시 흔들림을 선택해서 넘어질 수 있고, 잘 믿는다고 착각하다가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악한 세상에서 영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려면, 굳건하려면, 정말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세상은 “하루하루 흔들리고 요동하지만, 나부터 영과 진리로, 삶으로 예배드리고, 마음을 다해 서로 사랑하고, 힘을 다하여 봉사하며, 진심으로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기에, 이제부터라도, 나부터 흔들림보다 굳건함을 선택하여 예수 잘 믿으면, 나와 우리 가정과 교회, 내가 속한 모든 곳이 더 굳건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하루하루 빠르게 변화되지만, 한주도 우리가 굳건한 믿음을 택해서, 예수 잘 믿고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