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서 “남루한 행색의 할머니가 보따리를 들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할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딸이 출산하여 병원에 있다고 말할 뿐, 본인과 딸의 이름, 거주지와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이 “어렵게 수소문해서 할머니를 딸이 입원한 병원으로 모셔다” 드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들고 있던 보따리를 풀어서, 몇 가지 음식을” 내놓았습니다.
딸이 “식은 미역국, 나물 반찬, 흰밥을 보고 얼마나 목이” 메었을까요? 치매를 “앓던 할머니는 잊어버린 것이 많았지만, 출산한 딸에게 밥을 먹여야 한다는 것은 기억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지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딸을 기억하듯 사명자인 나도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교회와 기독교인을 책망하는 이유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느 3장을 “원어로 보면, 총 32절이 단 두 문단으로 되어 있고, 재건 지역과 재건에 동참한 사명자의 가문과 이름을” 말씀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공사 과정보다 성벽을 재건하는 사명자들의 이름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사역보다 주의 일에 헌신하고 섬기는 사람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모두에게 성벽 재건이 목표였지만, 건물보다 사람이 더 중요했고, 사람이 사명자로 세워져야 성전이 성전다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저술가 러스킨은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맡겨진 특별한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은 없다. 나는 나의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사명은 “자력으로 감당할 수 없고, 오직 사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바로 알고, 하나님 은혜로 살아갈 때! 비로소 제대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명은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기에, 사명자는 하나님 주신 사명을 찾고, 이를 굳건히 붙잡고 사명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사명을 크고 중요한 일에만 국한하지만, 지금 내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하는 모든 일이 다 사명”입니다. 실례로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교회와 직장에서의 직분, 인간관계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모든 것이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명자이기에,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1. 사명자는 항상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헌신자를 소개하며, ‘대제사장 가문이 있고, 누가 누구의 자손이고, 어디 출신인지, 귀족인지 평민인지’ 참으로 꼼꼼하게 사명자들을” 소개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명자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며 성경에” 기록했을까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수많은 사명자들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면, 내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도 내가 행한 일, 내 이름과 내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주변 사람에 대한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이 땅에 보내셔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시고, 게다가 부족한 내 이름을” 기억합니다. 비록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하고, 내가 하는 일을 주목하기에, 내 인생은 절대로 헛되지 않고 존귀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기억해? 잊었을 거야!’ 속삭이지만, 하나님은 사 49:16절에서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알고 기억하기에, 힘들어도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잊지 말고, 곁길로 빠져 방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함은 피상적이기보다, 인격적으로 나를 안다는 뜻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주 “16개월 만에 교회 사역이 재개된 후, 기대한 것보다 많은 분이 거룩한 성전에 오셔서,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아직도 우리 성도들 전부의 이름과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혹자는 “얼굴은 아는데 이름을 모르고, 혹자는 이름은 아는데 얼굴을 몰라서 혼동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유는 “2019년 9월에 부임 후, 성도를 알아가는 중, 팬더믹으로 인해 16개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과 전화 통화를 한 후에, 100% 교인의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가끔 “교인 중, 전화 주셔서 ‘목사님! 저예요!’ 말씀하면, 모르는데 아는 척을 할 수도 없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씁니다. 기도 부탁 등 “일이 있어서 제게 전화를 주셨는데, 제가 누군지 모르면 상처를 받을 수 있기에, 정말” 조심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 내 이름을 기억해주기 원하고, 기억해주면” 기뻐합니다.
그런데 “진짜 불행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의 이름과 삶을 기억하고 복 주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신실하게 잘 감당할 때, 그 이름을 선하게” 기억합니다. 본문에서 “많은 사람이 성벽 재건에 최선을 다했을 때, 선한 이름으로 기억되었지만, 방해했던 세 명은 성벽 재건을 방해한 사람으로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성경, 사람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데, 문제는 선하게 기억하는지, 악하게 기억하는지, 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은 다윗으로 총 1118회” 나옵니다. 이어서 “모세가 740회, 아브라함이 339회, 그 이름이 성경에” 나옵니다. 반면에 “여성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90회로 최다이고, 이어서 라헬, 레아, 이세벨, 예수의 모친 마리아 순으로, 성경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한 영혼이 성경과 역사에서 선하고 아름답게” 기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악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 주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하심을 확신하고, 믿음 가운데 영적으로 더울 신실해져야!” 합니다. 특별히 “사명자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일에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기에, 하나님이 그 이름을 기억하심을 알고” 살아갑니다.
지금 “내 삶에서 내가 감당해야 하고,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가정/교회/직장과 곳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을 허락하셔서 사명자답게 살아가도록” 이끄셨습니다. 물론 “사명을 감당할 때, 힘들고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명자에게 반드시 하늘의 상급과 복을 채우심을” 기억합시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에게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고, 내 이름을 기억해주시는 것”입니다. 한주도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신 은혜로 주신 사명 잘 감당하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사명자는 주의 일은 항상 함께 합력해야 더 능력이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수많은 사람과 가문, 수많은 직책의 사람이 힘을 모아 예루살렘 재건에 합력”하였습니다. 성경은 “예루살렘 성의 북쪽, 양문에서 공사가 시작된 이후!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각자 주어진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며 힘을 모으는 중, 전혀 분쟁과 다툼이 없었고, 모든 일에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 말씀합니다. 이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일하면서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참견하고 서로 간섭하는 일이 없었음을” 뜻합니다.
그렇게 “각자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합력했기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이 다시 과거의 영화로움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합력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어떤 사역에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서로 연합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각자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후, 각자의 일이 합쳐져서, 본문처럼 성벽을 재건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같이 일해서 합력하건, 각자 일해서 합력하건, 꼭 기억해야 할 영적 명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 형제자매이다. 한 하나님을 믿기에 경쟁보다 동역해야 한다. 옆 사람이 참으로 소중하다.” 우리 “하나님은 분쟁과 다툼이 아닌 합력과 일치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사도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전후로 분열과 다툼이 연합과 일치로” 바뀌었습니다. 눅 22:24절은 “또 그들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다툼이 난지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다툼, 원어는 말다툼, 논쟁, 변론이란 뜻으로, 제자들이 서로 자주 다투었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누가는 ‘사도들의 다툼이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밤에도 있었다.'”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성령을 체험한 후, 사도행전과 서신서는 한 번도 사도들의 분쟁과 다툼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한 후, 사도들은 주님의 공생애 시절처럼, 한 곳에서 함께 동역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역지에서 서로 합력하며” 동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명자인 우리 각자가 연합과 일치를 지킬 수” 있을까요?
우리 “각자가 서로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합력하려면, 서로 양보하고, 서로에게 맞추어주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많은 사명자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면서 어떻게 합력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역 중, 인간이기에, 충분히 생각지 않은 갈등, 경쟁과 시기가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그들은 서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 양보하며 합력을 지켰기에, 많은 훼방과 공격을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주안에서 합력이 중요함을 알지만, 내가 합력하기보다, 타인이 내 뜻에 합력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리 문제, 구원 문제, 소중한 영혼의 생사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서로 양보하고 합력해야!” 합니다. 최근 “많은 신학자는 ‘교회가 성장하려면, 프로그램과 인적 자원, 건물과 주차장 등등 하드웨어가 중요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분쟁과 다툼을 이기고 하나 되는 합력이 교회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말합니다.
진리와 “복음,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면, 오히려 사랑으로 양보할 때, 더 큰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이 양보와 합력을 잃는다면, 절대로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덴마크의 “그룬투비 목사는, 지금도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 국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룬투비가 “65세 때, 코펜하겐 시의원에 출마했지만, 56표 차로 낙선하자, 코펜하겐시 시민들이 국왕에게 그룬투비를 시의원에 임명해 달라!” 청원했습니다.
심지어 “그룬투비 목사를 이긴 경쟁자가 시민의 청원을 듣고, 스스로 의원직을 그룬투비 목사에게” 양보했습니다. 이처럼 “경쟁자의 양보와 시민의 지지와 합력으로 시의원이 된 그룬투비는 덴마크 발전을 위해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국가 방향이 정해지면 합심하여 강력하게 추진하라. 조국 덴마크를 사랑하라.” 우리는 “이제 팬더믹과 함께 다가온 New Normal 시대를 배워가며 다시 적응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어렵고 익숙하지 않아서, 과거의 신앙과 달라서, 내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동역자와 수평적으로 합력하고,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합력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주신 교회의 사명, 내게 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앞으로 “교회와 우리 각자가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진리 문제 외에는 양보하며 합력해서 더 크게 쓰임 받는 한 소망 교회와 우리 각자가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