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는 개구리가 버터를 만든다!” 짧은 “이 속담에는 어떤 환경에도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개구리 “두 마리가 큰 우유 통에 빠졌는데, 한 마리는 ‘나는 우유 통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체념했고,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다른 개구리는 어렵고 힘든 것을 알았지만, 끊임없이 우유 안에서 발을 움직이고 휘저으며 수영하였고, 마침내 액체였던 우유가 딱딱한 버터가 되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갑자기 불타고 허물어진 현실을 겪으면서, 큰 좌절과 상실감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불타고 무너진 현실에서 ‘내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힘들어도 “내가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면 길이 열리지만, 현실에 위축되어 포기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하고, 마침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 때, 술 관원으로 평탄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느헤미야는 하나니를 통해 동족의 환난과 불타고 허물어진 예루살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당시 “느헤미야가 거주하던 수산 궁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870마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비록 “수일간 금식하고 통곡하며 허물어지고 불탄 현실을 아파했지만, 누구와 함께할지, 어떻게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지, 모든 것이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현실에 함몰되어서, 위축되고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느헤미야는 불타고 허물어진 현실에 깊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고정했고, 나아가서 더 구체적인 영적 결단을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197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일리아 프리고진이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혼돈이란 단순히 의미 없는 요동이 아니라, 언제라도 질서를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내포한 상태이다!” 불타고 “허물어진 현실에서, 위기의식으로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고정함은 문제 해결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가 “팬더믹 이후 우리 삶을 재건하려면, 혼란 중에도 다시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영적 잠재력을 찾아가야!” 합니다. 특히 “그 영적 잠재력을 말씀에서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불타고 허물어진 현실을 극복하려면, 위기의식을 가지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결단을 넘어, 과연 어떤 영적 결단이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1. 허물어지고 불탔기에 간절한 기도로 내 삶을 바꾸어가야 합니다.

본문 4절은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말씀합니다. 느헤미야는 “동족의 환난과 불타고 허물어진 예루살렘 소식을 듣고, 세상과 사람이 아니라, 코람 데오의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특히 “본문 5절에서,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말씀합니다. 간구하다. “원어는 동사가 아닌 감탄사로, 애원과 간절한 요청을 드리는 태도를”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허물어지고 불탄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무엇보다 간절한 기도를” 택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고, 불타고 허물어진 현실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도는 매우 익숙하지만, 실제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영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팬더믹을 “겪으며 죽겠다. 힘들다. 막막하다! 하소연과 낙담은 많아졌지만, 간절한 기도는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간절한 기도로 충분히 허물어지고 불탄 현실을 이길 수 있었지만, 이를 놓치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기독교인이 기도의 능력을 잃으면 내 삶은 허물어지고 불탄 현실에 함몰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약하고 부족해도, 느헤미야처럼 울며 드리는 기도, 금식하며 드리는 기도, 간절히 뜨겁게 드리는 기도는 불타고 허물어진 현실을 이길 지혜를 주고, 마침내 아픔과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역사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내 삶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주저하고 방황하는 내 삶과 방향을 하나님 뜻과 합하도록 이끌어” 갑니다. 간절한 “기도는 불타고 허물어진 현실에서 거룩하고 복된 소망을 보게” 합니다. 눅 22:44절은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말씀합니다. 누가는 “한 구절에서, 주님께서 힘써서, 애쓰며, 간절히 기도했음을” 강조합니다.

유사한 “표현이 세 번 반복되어,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강조합니다. 게다가 “현대 의학은 모세 혈관이 파열될 정도로 주님의 기도가 간절했다!”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도 간절한 기도로 연약한 제자를 살렸고, 십자가를 지고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불타고 허물어진 현실에서, 마음을 다하여, 집중하여 하나님께만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마음에 “이것저것 생각하며 드리는 기도는 절대로 간절한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한 “기도는 돼도 그만 안돼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성취됨을 믿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한 기도에는 눈물이 있고 낮아짐이 있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있습니다. 지금 “내 삶이 불타고 허물어졌다면, 다른 무엇보다 간절한 기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오래 기도하지 않아도, 마음을 다해서 짧게 기도해도, 엄청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호주에서 “케이트 호그가 임신 27주 만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문제는 “딸은 건강했지만, 아들은 호흡하지 못해서 의사가 사력을 다해 응급처치를” 합니다. 케이트와 “남편도 숨죽이고 아이를 주목했지만, 무려 20분 동안이나 아이의 호흡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케이트가 간절함으로 의사에게” 부탁했습니다. “제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아이를 안아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의사는 “아이를 잃은 엄마의 간절한 호소를 외면할 수 없어서, 아이를 안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엄마가 쓰다듬고 입 맞추며 ‘사랑한다! 아가야!’ 속삭임이 몇 분간 이어진 후, 놀랍게도 아기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살아났습니다. 엄마의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이 죽어가는 아이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던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내 생각과 미래를 바꾸고,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과 거부보다, 원망과 불평보다 먼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실제로 “‘뭐가 문제야! 누가 나빠!’ 비판한다면, 나는 그 문제와 그 사람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절한 기도는 불평과 원망을 이기고, 불타고 허물어진 곳, 아픈 곳을 찾고 메꾸고 회복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팬더믹으로 힘들지만, 다시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주도 “우리가 간절한 기도를 회복하여 불타고 허물어진 곳을 Rebuild 해 나가기를” 소원합니다.

2. 허물어지고 불탔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언약)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불타고 허물어진 이유를, 본문 7절에서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했습니다. 또한 “본문 9절은,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말씀합니다. 당시 “느헤미야가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심령의 통곡과 간절함이 얼마나 깊고” 컸을까요?

느헤미야는 “무작정 불타고 허물어진 예루살렘의 회복을 구하지 않았고, ‘말씀대로, 약속대로 이루어달라!’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불타고 “허물어진 현실은 인간의 지혜와 과학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만이 다시 살려낼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으로 어긋난 원인을 찾아서 회개하고, 말씀을 회복할 때, 허물어지고 불탄 곳을 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말씀에서 길을 찾기보다 사람과 인터넷, 세상에서 답을 찾으려 헤매며” 살아갑니다.

마침내 “해결책은 고사하고, 매번 불타고 허물어진 삶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오늘 우리가 말씀에 너무 무지하고, 게다가 말씀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한동안 “아내가 결혼 전에 제가 쓴 편지를 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아내를 쫓아다니며 구구절절이 편지를 썼고, 아내도 밑줄까지 그으며 편지를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절대로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즉시” 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시며 나를 살린 말씀, 나를 향한 사랑 고백이 가득한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불타고 “허물어진 인생, 가정, 교회, 사회를 다시 살릴 답이 성경에 있지만, 이를 누리지!” 못합니다. 창 1장에서 “천지 창조 과정을 보면, 중요한 공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모든 채소와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늘의 해와 달이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천지에 생물이 충만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그대로 되라!’ 말씀하면 그대로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허물어지고 불탄 현실에서 일어나라! 말씀하면, 역시 그대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어지고 불탄 현실에서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책,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인간적 지식, 얄팍한 술수와 꾀가 아니고 우리를 향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아는 지혜이다.” 교회사에서 “초대 교회가 타락해 갈 때, 많은 기독교인이 사막에서 말씀 회복 운동을 전개하여 허물어지고 불탄 교회와 세상을” 구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말씀을 붙잡으면서, 중세의 암흑기를 극복하고, 허물어지고 불탄 교회를 다시 반석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히 4: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말씀합니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기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바로 알고 붙잡으면, 불타고 허물어진 현실을 넉넉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족해도 “우리는 (1)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붙잡을 수 있고, (2) 주일 설교를 반복하여 들으며 말씀을 붙잡을 수 있고, (3) 성령께서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는 말씀을 붙잡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현대사회 곳곳이 허물어지고 불탔지만, 인터넷의 발전으로 말씀을 가깝고 쉽게 접할 수 있는 길이 그래도 넓게 열려” 있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나와 가까이 있음을 아는 것보다, 실제로 내가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 말씀을 붙잡고 매일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불타고 “허물어진 내 신앙을 Rebuild 하려면, 내 고집과 세상 생각을 내려놓고, 오히려 ‘-라고 말씀하니 그대로 되니라!’ 말씀을 능력을 붙잡고, 이를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시 119: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합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이 불타고 허물어졌기에, 역시 하나님 말씀으로만 이 모든 것을 Rebuild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주도 “우리가 더욱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의지하여 불타고 허물어진 오늘을 Rebuild 하는 승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